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3일 방송된 '낙인-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섬'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서영희, 배우 최원영, 가수 청하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금단의 장소에 있는 유리병

오늘은 사진 한 장 보여주면서 시작할게. 아이들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야. 이 아이들, 지금 뭘 하는 걸까? 이 사진은 엄청난 이야기를 담고 있어. 이 아이들이 있는 이 곳, 대체 어떤 곳일까 궁금하지? 그곳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려줄게.
때는 1996년.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한 남자가 친한 형님, 동생들을 만나 아주 신이 났어. 제대로 술판이 벌어졌지. 그러다 술에 취해 깜빡 잠이 들었는데,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꼭 해야할 일이 생각났거든. 그 밤에,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술을 얼마나 마셨냐면 소주 너홉 들이를 갖다가 세 명이서 두 병을 마시고 갯벌에 가 가지고 조개 잡고, 바지락 잡고 야단블루스를 췄어요. 그걸 다 마시고 새벽에 딱 깨어났는데, 갑자기 이상하지. 새벽이었는데, 이걸 갖다가 사진을 찍었다는 이야기예요."
-이창호(가명), 고향을 찾은 남자
남자는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사진으로 꼭 남기고 싶은 게 있었어. 비몽사몽 술기운에 카메라를 챙겨 집을 나서. 깜깜한 밤, 파도 소리만 철썩철썩. 달빛에 의지해, 기억 속의 그곳을 향해 걸어갔어. 도착한 곳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한 건물 앞이야. 남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좌우를 살펴.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거든. 조심스럽게 출입문을 미는데, 어라? 문이 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그토록 카메라에 담고 싶던 그것에 렌즈를 대고 찰칵! 셔터를 눌렀어.
남자가 찍고 싶었다는 사진, 뭐였을지 궁금하지? 그런데 이 사진, 많이 충격적일 수 있어. 하지만 오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너무도 중요한 사진이야. 마음의 준비를 하고 봐.


유리병 안에 담긴 건, 태아야. 포르말린 용액에 담긴 태아의 표본. 팔, 다리, 손가락, 발가락, 신체가 온전히 형성돼 있어서 출생 시기가 거의 다 된 걸로 보여. 어떤 유리병엔 여러 태아가 한데 쌓여있기도 해. 태아 표본이 있는 이 붉은 벽돌 건물은 대체 어디일까? 사실, 현장엔 태아 외에도 또 다른 인체 부위 표본들이 있었어.

사람의 뇌나 간, 손이나 장기가 담긴 유리병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야. 표본이 담긴 유리병의 개수는 총 122개. 그중 14개의 유리병에 태아가 담겨 있어.
사진을 찍은 남자는 자라면서 내내 이곳이 궁금했어. 어릴 때, 아이들은 가지 못하게 하는 금단의 장소였거든.
"나는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인가 됐었어. 나처럼 호기심 많은 소년이 거기 가서 이제 심심하니까 어느 날 이걸 들여다본 거야."
-이창호(가명), 표본 사진을 찍은 남자
세상 궁금한 게 많던 10살 소년 시절의 어느 날, 기회가 왔어.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슬금슬금 붉은 벽돌 건물로 다가갔는데, 마침 창문을 가렸던 창호지가 살짝 찢어져 있는 거야. 어린 소년은 창문에 눈을 바짝 갖다 댔지. 그리고 "으악! 저게 뭐야!!!" 소년은 건물의 비밀을 목격한 순간, 깜짝 놀라서 줄행랑을 쳤어. 그리고 어른들에게 가서 물었지.
"쉿! 너 어디 가서 너 본 거 얘기하면 큰일난다. 못 본 걸로 해라!"
어른들은 못 본 척 하라 했어. 그렇게 묻은 비밀, 살면서 내내 남아있던 잔상. 이건 뭔가 잘못된 거라는 걸 깨달은 소년은 비밀을 묻고 20년 후, 어른이 되어 찾아가 카메라에 담은 거야. 남자가 찾아간 곳은 어디이고, 그가 살았던 마을은 대체 어떤 곳일까. 지도에서 보여줄게.

이곳은 소록도. 혹시 들어본 적 있어? 전라남도 고흥군 녹동항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섬이야. 정부에 의해 외부인의 출입은 금지된 채, 한센병 환자들만 격리돼서 살았던 섬이야.
혹시 '한센병'이라고 알아? 한센병은 과거에 '나병'이라고 불리기도 했지. 한센병균 혹은 나균이 피부나 말초 신경계를 침범해서 조직을 변형시키는 전염병이야. 이 병에 걸리면 피부에 넓게 붉은 반점이 생기고, 손가락과 발가락 감각이 무뎌지면서 떨어져 나가기도 해. 얼굴과 손발 등 외모에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센병 환자들을 '문둥이'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꺼리는 경우가 많았어.

그런데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소록도에 왜, 태아 표본이 있는 걸까? 20년 만에 용기를 내어, 금단의 문을 열고 들어간 남자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어.

"포르말린하고 그 사이에서 이게(용액이) 막 줄줄 흘렀어. 내가 이제 사진을 찍고 나서 했던 일이, 이 뚜껑을 열었어요. 유리병 뚜껑을 열어 가지고, 뭐랄까. 뭐라고 해야 하나… 쓰다듬어 줬단 이야기지. 내가 할 짓이 그거밖에 없으니까. 완전히 방치된 거지. 그러니까 더 서럽잖아."
- 이창호(가명), 표본 사진을 찍은 남자
태아 표본이 방치돼 있었던 거야. 대체 왜, 누가, 태아 표본을 모아두고 관리도 안 한 건지. 한센병과 태아가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 그 비밀을 파헤쳐 볼게.
▲ 소록도에 격리된 사람들
시간을 거슬러서 때는 1954년 6월, 초여름이야. 출산이 임박한 산모가 있어. 그런데 이 출산 현장은 다른 곳과 좀 달라. 산모의 비명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갈까 노심초사야. 왜? 출산을 들키면 안 되거든. 소리를 죽이고 힘겹게 진통한 끝에, 사내아이가 태어났어. 그리고 아가 우는 소리도 조심시켜. 왜 이렇게 조용히, 조심스러워하는 걸까?
사실 여긴,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되는 곳이거든. 여기는 바로, 소록도야. 왜, 소록도에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걸까. 남철이의 이야기 듣다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어.
전라남도 함평군의 한 초등학교 5학년생이던 남철이 몸에, 갑자기 이상한 증상이 생겨. 피부에 하나 둘, 발진이 생기는가 싶더니, 점점 부위가 넓어지고, 피부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한센병에 걸린 거야.

"이 병 걸리면 후유증이 나와요. 아주 흉한 모습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쳐다봐요. 꺼리고. 그 쳐다보는 거 그게 제일 싫었어요. 얼마나 심하게 꺼리냐 하면은, 마을 공동 우물에 물 길러 가도 물을 못 길러가게 해요. 물동이가 혹시나 균이 오염되지 않았나 해가지고 못 오게 한 거예요. 그리고 사람도 샘가에 오지 마라..."
- 이남철, 한센병력자, 12세 발병
이웃들은 손가락질을 하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놀리고 곁에 오질 않아. 결국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어. 남철이는, 한센병 환자들만 격리해 치료한다는 소록도에 들어가기로 했어.

"확실히 기억하죠. 1966년 59년 전에 5월 16일 날, 제가 아버지하고 같이 이곳에 (소록도에) 들어왔습니다. 그때는 치료받는다기 보다도 격리시킨다는 인식을 받고 왔어요. 아버지가 저를 여기다 놔두고 갈 적에 뱃머리까지 같이 나갔거든. 아버지 가는데 배웅하러. 아버지께서 '절대 뒤따라 보지 말고 그냥 가라. 들어가라' 그랬는데, 또 그럴 수가 있나요? 부모님, 아버님인데. 이렇게 뒤로 돌아보니까, 앉아 가지고 울고 계시더라고요. 부모님과 형제들과 영영 이별이구나.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병이 생겼는가…"
- 이남철, 한센병력자, 12세에 발병
작을 소, 사슴 록, 작은 사슴을 닮은 섬이라고 해서, '소록'이란 이름이 붙은 소록도. 면적은 여의도보다 조금 더 넓은데, 섬 전체가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7개의 마을로 이뤄져 있어. 많을 땐 6천여 명의 한센병 환자가 소록도에 살았어. 소록도는 1번지와 2번지로 나뉘어 있어. 소록도에 도착한 어린 남철이는 2번지에서 살게 됐어.

1번지는 직원 구역, 2번지는 환자 구역. 다른 이름으로 1번지는 무독 지대, 2번지는 유독 지대라고 불렀어. 독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란 거지. 1번지와 2번지 사이엔 길게 철조망이 쳐져 있어. 경계선의 감시소를 거치지 않고는 2번지에서 1번지로 갈 수 없어. 외출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해. 완전히 단절돼 있는 거지. 뿐만 아니야. 소록도로 올 때 타는 배도, 환자용 배와 직원용 배가 다르고, 선착장마저 달라. 심지어 환자가 직원과 대화할 때의 규칙이 있었다고 해. '직원과 다섯 걸음 이상 거리를 유지해라', '말할 땐 45도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손으로 입을 가려야 한다', '직원이 바람을 등지고 서야 한다' 같은. 바람을 타고 혹시라도 병이 옮을까 봐.
환경도 열악해. 방 여러 개가 쭉 이어진 공동주택 형태였는데, 작은 방 한 칸을 8명이 같이 썼거든. 먹을 것도 변변치 않고 특히 겨울엔 너무 추워. 아침에 일어나면 걸레가 얼어 있을 정도야. 남철이는 소록도가 병원이나 요양소라기보다 일종의 강제수용소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 하지만 간장에다 밥만 먹어도 남철인 마음이 편했대. 이곳엔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없었으니까.
고단한 삶이지만, 남철인 어느덧 20대의 청년이 됐고, 소록도에서 일자리도 찾았어. 환자 중 몇 명을 '의료조무원', 일종의 간호조무사로 뽑았는데, 남철이도 뽑힌 거야. 아주 성실했거든. 혈압 재고, 열 재고, 이런 업무를 했지. 그런데 소록도는 몇 천 명이 사는 일종의 큰 마을이잖아. 남녀노소 여럿이 모여 살다 보니, 그 안에서 사랑도 싹 텄어.

"바닷가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면 아주 예쁜 바위가 있는데 '연애바위'라는 바위가 있어. 왜 연애바위예요. 그게 거기서 많이 사랑을 나눴는가 보지..."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한센병 환자로 소록도에 들어왔지만, 사랑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어. 주변에선 결혼 적령기가 된 처녀, 총각들을 사람들은 막 이어주려고 해.

"70년도에 와서 74년도 열아홉 살에, '너 그리 시집 가라' '시집 갈래?' 그러는 거예요. 난 모르겠다고 얘기했었지. 아무것도 몰라 그때는. 그러면 '그리 가라' 해서 (사람들이) 다 결혼 날짜 잡아놓고 다 해줘요."
-정월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같이 한 마을에 살고 교회도 다니고 그러니까 거의 매일 보니까. 나도 장가를 한번 가봐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간다고 했죠. 결혼하는 날 같이 좋은 날이 없어. 우리는 생일이 한 날이에요. 만나보니까 생일이 같더라고. 그런 사람 없어요 소록도에. 옛날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어요."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생일이 같은 내 운명의 상대. 그렇게 식을 올린 게 50년 전이야. 생일도 같으시더니 두 분 정말 닮으셨지?
▲ 아이를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소록도엔 결혼의 조건이 있었어. 소록도의 남자들은 결혼 전, 어떤 수술을 해야 했어. 수술의 이름은 '단종수술'이야. 당시 소록도 결혼의 조건이 적힌 문서가 있어.

"음성으로 치유되었으나 사회 복귀하여 생활하기 어려운 노령자, 무의무탁자, 신체장애 환자들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도록 부부 동거를 허용 하고 있다. 그러나, 가임환자가 동거를 원할 때에는 불임시술 후 동거하도록 하고 있다."
결혼을 하려면 불임수술을 하라, '단종수술'은 남성 불임수술을 뜻해. 한센병은 유전병이 아니라는 걸 당시에도 알고는 있었어. 설사, 어떤 병이 유전된다고 해서 임신을 금지한다는 게, 아니 이건 금지 정도가 아니지. 아예 임신을 할 수 없게, 불임수술을 받아야만 결혼을 허가한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심지어 음성으로 치유된 사람도 불임수술을 해야 한대.
남철 씨는, 다행히 수술을 피했어. 몇 년마다 소록도 원장이 바뀌었는데, 마침 남철 씨가 결혼식을 올릴 당시의 원장은, 엄격한 스타일이 아니었거든. 얼마 뒤, 남철 씨와 월선 씨 사이엔 곧 아기도 생겼어. 그런데 두 분은 기뻐할 수가 없어. 소록도만의 기막힌 법이 또 하나 있었거든.

"여기서 임신 못 하게끔 돼 있거든. 임신했다고 하면 병원 법을 어겼다고 해서 그렇게 낙태를 시켜버려요. 낙태할 때도 애기 엄마들이 많이 죽었대요."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임신을 하면, 낙태를 시킨다는 거야. 당시 보건사회부는 소록도에 이런 지시 사항을 하달했어.

'임신 가능한 자에 대해서는 단종수술을 적극 장려하여 가족계획에 완벽을 기할 것'
'임신 가능한 자를 항상 조사 파악하여 출산을 최대한 억제토록 할 것'
이에 따라 소록도 병원은 매월 정기적으로 젊은 부녀자들의 임신 여부를 검진하고, 출산을 금지했어. 혼전 임신이나, 단종수술을 피한 틈에 임신이 되기도 했는데, 임신한 걸 들키면 낙태를 시킨 거야. 남철 씨와 월선 씨는 첫 아이에 이어, 두 번째 아이도 지킬 수 없었어. 그렇게 소록도의 많은 여인들이 아이를 잃었어.

"저 같은 경우는 말하자면 이렇게 비밀로 임신했잖아요. 어느 날 간호사하고 의사하고 간호과장하고 다 와서 여자들 싹 나오라는 거예요. 이제 우리 동네에 그런 임신자가 생겼으면, 그거 보고가 들어가면, 딱 이렇게 사람들 다 눈치를 보고 배도 보고 행동도 보고 그래 갖고 딱 집어내.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그렇게 끌려갔다고. 까마귀가 까마귀 낳지, 까치를 낳을 수가 있느냐고. 말하자면, 한센인이 한센인 낳는다는 그런 식으로. (낙태할 때) 그 주사를 맞았지 싶어요 여기(배)다가. 막 몸부림하다가 뒹굴다가 (태아가) 나와. 뒹굴다가."
-장인심, 강제 낙태 피해자, 소록도 거주
아까 앞에 보여준 태아 표본 사진 있었지? 표본으로 만들어졌다 방치된 그 태아들은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가 잉태했다는 이유로, 강제 낙태되어 세상을 만나지 못한 태아들이었어. 아이를 잃은 것도 원통한 데, 낙태 직후 너무도 끔찍한 일을 겪은 분도 있어.
"세탁소 업무를 하다가 소록도에서 남편을 만나서 연애를 하다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임신 사실을 숨길 수가 있었으나, 결국에는 배가 나오기 시작하자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고 결국 병원으로 끌려갔습니다. (중략) 낙태 수술을 당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어느 날 경찰이 오더니 아기를 보러 가자고 해서 뭔지 모른 채 끌려갔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사산해서 낳은 태아를 알콜에 담긴 병에 넣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정말 통곡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고, 차라리 보여주지를 말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악독합니다."
- 낙태 피해 진술서 中
태아 표본을 보여준 의도가 뭐였을 거 같아? 한센병 환자는 절대로 임신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알려주려는 본보기용이었고 해.
남철 씨와 월선 씨가 두 번째 아이도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데, 마을 스피커가 떠들썩하게 울려. "이남철 씨, 지금 바로 수술실로 오세요"라며. 이제 더 버티지 말고 남철 씨에게 단종수술을 받으러 오라는 호출이야.

"온 동네방네. 그러니까 남이 다 알아. 모르는 사람 없어."
-정월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기분 나쁜 것 보다도, 진짜 진짜 죽겠대. 마음이 아파. 인간인데 인간 대접도 못 하고, 이렇게 살아야 되나. 그 당시에 딴 것이 강제가 아니고 이게 강제 수용소다. 그런 생각도 했었죠. 내 마음대로 못 하니까 강제 수용소나 마찬가지지."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남철 씨는 결혼 4년 만에 결국 단종 수술대 위에 누웠어. 그마저 전문의사가 수술한 것도 아니야. '의학강습소' 출신에게 수술을 받았어. 한센병 환자 중 몇몇을 선발해 기초의학이나 해부학 공부를 시키는 의학강습소라는 게 있었거든. 여기 출신들에게 수술까지 시켰던 거야. 아예 복원이 불가능하게 수술하는 경우가 많았대.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철 씨와 월선 씨는, 평생 아이를 갖지 못했어.
▲ 섬 안에 있던 아이들
그런데, 아까 무사히 태어났던 아이, 기억해? 그 아이는 어떻게 소록도에서 태어날 수 있었을까? 소록도에는 5~6천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살다 보니, 감시의 눈이 닿지 않은 곳도 있었어. 원장마다 관리 스타일이 좀 달랐다고 했잖아. 임신 가능한 여성에 대한 조사가 좀 느슨했던 때였던 거지. 태어난 아이의 부모는 둘 다 한센병에 걸려 소록도에 들어왔다가,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어. 임신 기간 동안 엄마는, 점점 불러오는 배가 티나지 않게 천으로 배를 꽁꽁 동여맸어.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은 아무도 비밀을 말하지 않고 임신 사실을 숨겨줬어.
그렇게 세상에 태어난 아기의 이름은 김인수(가명). 그런데 인수가 몸이 좀 약해 보여. 임신 기간 내내 엄마가 맘을 졸이며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몸이 약해 오래 못 살 거 같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다행히 인수는 살아 남았어.

"저희 어머님이 19살에 소록도 들어왔어요. 저희 아버님하고 소록도에서 만나 가지고 이제 두 분이서 부부의 연을 맺고, 저를 낳은 거지요. 저를 낳으시고, 이제 감춰야 되니까, 애를. 감출 데가 뭐 따로 없어서, 긴 광목 치마를 입고, 그 치마 속에 저를 감췄어요. 그 방 식구들이 여덟 명이 다 와 갖고, 한 집에 저희 어머니를 감추고, 저를 감추고 막 그랬대요. 애다 보니까 울음도 울어야 되고. 배고프면 울어야 되고. 젖을 못 먹으니까 울어야 되고. 그러니까 그게 뭐 얼마나 갔겠습니까? 그래 갖고 이제 발각이 돼 갖고..."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직원은, 엄마 품에 안겼던 인수를 떼어내서 소록도 안의 보육소로 데려갔어. 한센병에 걸린 부모와 함께 섬에 들어왔거나, 인수처럼 몰래 태어난 아이들을 키우는 보육소가 있었거든.


섬 밖에서 태어났든 섬 안에서 태어났든, 아이들에겐 부모가 있잖아, 그것도 같은 소록도 안에. 왜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 보육소로 데려갔을까? 소록도에선 한센병 부모에게 태어난 아이들을 부르는 단어가 있어. 바로 '미감아'. '한센병 환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직 한센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라는 뜻이야.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아이라는 건, 이건 그냥 건강한 아이라는 거잖아. 근데 '미감아'라는 말엔, 언젠간 걸릴 수 있을 거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는 거야. 아이들이 한센병 부모와 같이 살다가 전염이 될 수 있다며, 보육소에 모아서 키웠어.
보육소는 1번지, 직원 구역에 있었어. 그럼 2번지에 있는 엄마는 보육소를 방문할 수 없어. 면회 불가야. 두 구역을 나눠놓은 철조망을 넘을 수 없으니까. 엄마는 아이를 볼 수도 없다는 의미야.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잡혀 갔다고 그러는데, 뺏어간 거지. 우리 어머니께서 저를 보육원에 뺏기고 나서 3년을 고개 너머, 저를 보지는 못해도 내가 있는 곳을 향해서 3년을 이제 산을 넘었는데. 거기 가서 두세 시간 울고 3년은 우셨답니다.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 곳으로 향해서 이제 내 자식 뺏겼다고. 3년을 하루도 안 빠지고, 365일 1년에 한 번도 안 빠지고, 철조망 밑에서 아들 부르면서 이제 우시는거지. 너무나 눈이 전부 뭉개져가지고 시력이 완전히 갔어요. 눈이 짓눌려가지고, 봉사가 됐더라고."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자식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지만, 매일같이 자식과 가장 가까운 곳까지 찾아와 아들을 부르며 우는 엄마. 한센병 후유증인지, 정말 눈물에 짓무르신 건지, 인수를 뺏긴 엄마는 결국 시력도 잃으셨어.
아기를 가질 수도, 낳을 수도, 키울 수도 없는 소록도. 그럼 보육소로 간 인수는 잘 지냈을까? 보육소 분위기는 소록도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다르지 않아. 아직 어린 아이들인데 완전 군대식 관리를 해. 아침 점호를 하고, 체벌도 있어. 큰 아이들이 어린 아이들을 때리기도 해. 무엇보다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인데 먹을 것이 부족해.
"최고로 기억에 남는 게 배고픔. 진짜 배고픔은 못 참겠더라고요. 명절이 되면 직원들은 막 고기에 뭐 해서 먹고 이제 구정물 통에 버려요. 그럼 애들이 그 뼈다귀 건져 먹으려고 구정물 통에 손을 넣어서 그 뼈다귀 건져서 뜯어먹고 그랬어요."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 통곡의 수탄장
그런데, 이렇게 항상 배고픈 아이들이 유독 기다리는 날이 있었어. 그날이 오면, 갑자기 보육소에서 아이들을 깨끗이 씻기고 1년에 딱 두 벌 주는 외출복도 입혀.

"지금 소록도 가시면 '통곡의 신작로' 일본말로 신작로라고 해요. 이 통곡의 신작로인데 한 달에 두 번도 아니고 세 번도 아니고 딱 한 번이야. '내일 아침에 엄마 아빠 만나러 간다. 먹을 거 많이 갖고 오겠다'… 그래서 저희가 이제 면회 때만 되면 잠을 안 자요. 애들이."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한 달에 한 번, 엄마 아빠를 만나는, 면회 날이야. 한 달 내내 이날만 기다려 온 인수 엄마도 밤잠을 못 이뤘어. "추운데 동상은 안 걸렸으려나... 혹시라도... 우리처럼 한센병이 생기지 않았겠지..." 아껴뒀던 쌀로 떡을 찌고, 계란을 삶고, 감자와 고구마도 쪄.
드디어 면회 당일이야. 엄마, 아빠들이 먼저 집을 나서. 1번지와 2번지, 직원 지대와 환지 지대 사이, 철조망이 쳐진 경계선 근처에 도착해. 동네별로, 아이 나이별로, 어른들이 먼저 한 줄로 길게 자리를 잡아. 소록도 안의 모든 부모가 한 번에 나와 줄을 서는데, 그 길이가 수백 미터는 됐어. 푸른 바다를 옆에 끼고 길게 늘어선 줄. 직원들은 부모들에게 바람을 마주해서 서라고 지시해. 행여나 부모를 스친 바람이 병을 옮게 할 까봐.
엄마, 아빠들이 자리를 잡으면, 이제 보육소에 있는 아이들이 출발할 차례야. 나이순으로 한 줄로 서서 하나, 둘, 하나, 둘, 발맞춰 가. 드디어 저 멀리, 엄마, 아빠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여. 두리번거리며 각자 자신의 엄마 아빠를 찾아 그 앞에 서. 한걸음, 두 걸음, 아이가 엄마에게 다가가려는 그 순간!
"멈춰! 뒤로 뒤로! 2미터 간격 유지한다!"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며 제지해. 엄마와 아이는, 2미터 간격을 유지해야 해. 그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어. 엄마를, 아이를, 오직 눈으로만 봐야 해. 바라만 볼 뿐, 만지지도 안을 수도 없어. 아까 처음에 보여줬던 아이들이 일렬로 서 있었던 사진, 기억나?

사실 그게, 아이들을 마주 보고 엄마와 아빠가 서 있었던 거야. 사진 전체를 다시 보니 어때? 여기 서 있었던 아이 중 한 명이었을 인수 씨의 이야기, 들어볼게.

"사감 선생이 호루라기를 불면 부모들은 가만히 있고 자녀들은 3보 이상 딱 가요 부모들 앞에. 그런데 바짝도 못 가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손도 한번 못 잡거든요. 손 한 번 딱 잡으려고 하면 선생이 뛰어와서 부모 있는 데서 막 몽둥이로 때려 버리고 이랬거든요. 부모님들이 바리바리 싸가지고 와요. 내 자식 줄 거라고. 원래 그 자리에서 먹어야 해요. 왜냐하면 그걸 가지고 또 기숙사에 들어가면 큰 애들한테 다 뺏겨요 작은 애들이. 서로 배가 고프니까. 1시간 다 끝나면 면회 시간 끝나면 또 저쪽에서 호루라기 딱 불면 딱 헤어져야 돼. 이제 헤어질 때는 바로 눈물 바다입니다. 통곡하고 땅을 치고 부모들은 난리고 또 한 달을 기다려야 되니까. 한 서려서 울고 그렇습니다."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이 길을 사람들은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이라고 불렀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이 멈추지 않는 엄마와 아빠. 더 슬픈 사실은, 아이들은 너무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다 보니까, 부모에 대한 그리움보다 배고픔이 더 절실해. 한달에 한 번은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까. 엄마, 아빠가 던져주는 음식을 허겁지겁 주워 먹기 바빠. 엄마는 행여 아이가 선생님에게 혼날세라, 아이를 와락 안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누군가는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어. '아이를 엄마에게서 데려간 게 아니라, 아이를 엄마에게서 뜯어갔다'고. 그렇게 눈물의 면회가 이뤄졌던 '수탄장'. 눈앞에 아이가 있는데 얼마나 안고 싶었을까.

"이 사진이 참 저한테는 진짜 이 가슴 아프고. 부모가 있는데도 한 달에 한 번을 한 시간을 주어진 시간에서 만나야 되고. 죄인도 아닌데 부모를 함부로 만날 수도 없는 그런 세상이 왜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의 사회가 참 원망스럽고. 한센병이, 병력자들이 무슨 사회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오로지 내가 병을 갖고 싶다 해서 병든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사회적으로 폄훼하고 완전히 죄수 수용하듯이 수용하고 이래 했을까. 생각만 하면 참, 하… 목이 멥니다."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한 달에 한 번 면회마저도,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끝이야. 중학교는 소록도 밖으로 가야 했거든. 한센병 환자의 자녀들만 따로 격리해서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삼육학원이란 기숙학교가 대구에 있어. 인수는 엄마, 아빠와 떨어져서 대구삼육학원으로 갔지. 이 곳 생활은 어땠을까?

"군대더라고 군대. 신입생 1년동안 외출도 안 돼요. 교육기관이 아니고 순 사람 잡는다더라고."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매주 토요일은 이유없이 매를 맞는 날. '빠따 맞는 날'이라고 했을 정도야. 신입생들은 1년 동안 외출도 안 돼. 2학년이 됐어도 엄마를 만나러 갈 수는 없어. 소록도에서 외부인이라고 자녀들의 출입을 통제했거든. 부모님과는 편지나 전보로만 연락할 뿐이야.
▲ 무너진 철조망
삼육학원의 생활이 너무 고돼서 견딜 수가 없던 인수는, 학교를 뛰쳐나왔어. 아는 사람, 기댈 친척 한 명 없다 보니 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어. 공장, 철길 보수, 양계장, 농사일,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지내던 스무 살 무렵. 아버지로부터 전보 한 통이 왔어.
'인수야, 철조망이 철거됐다'
직원과 환자 지대를 가로막았던 철조망을 없앴다는 거야. 인수 씨는 곧바로 소록도로 달려갔지.

"제가 가장 행복했던 것은요. 철조망이 철거되는 그날이었습니다. 부모를 시간제한 없이 만날 수 있겠다. 이제 부모도 가서 품에 안을 수 있겠다. 철조망이 철거되고 엄마 품에 안겨서. 나이가 들었지만 응석도 부릴 수 있고. 또 엄마 볼도 한번 만져볼 수도 있고. 또 엄마가 주시는 밥도 직접 떠먹여 줄 수도 있고. 제가 어머니 밥을 떠먹였거든요. 그래서 그때가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가 '엄마'라고 부르니까 품에 안고 얼굴을 한 1시간 동안 만지더라고요.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얼굴을 직접 보고 싶은데 한 시간 동안 안 놓고, 좀 놔라 해도 안 놓더라고."
-김인수(가명), 한센병력자 2세
그렇게 품에 안고 싶던 내 아가 인수가,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엄마 품으로 돌아왔어. 말랑했던 아가의 손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거칠고 굵은 남자 손이 되었어. 덩치는 엄마보다 훨씬 더 커졌지만, 여전한 내 아가. 아들의 얼굴을 끝도 없이 어루만지는 엄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 낙인의 시작
아이를 가질 수도, 낳을 수도, 키울 수도, 그리고 만날 수도 없는 섬,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이 한 많은 삶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그 시작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한 일본은, '1등국' '문명국'에 도취돼 있었어. 이때 일본에선 '우생학'이 유행했어. 인간을 유전학적으로 개량해서 우등한 인류를 만들겠다는 게 우생학의 기본 개념이야. 우생학은 우월한 사람이 더 많은 자손을 남기도록 하고, 유전병과 장애를 지닌 사람의 출산을 억제시킨다는 논리로 이어져.
이 우생학을 근거로, 일본에서 '나예방법'이 만들어졌어. 예방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수용하는 법률이야. 일본에선 1909년부터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 격리하고, 단종과 낙태 수술을 하기 시작했어. 그로부터 7년 후인 1916년, 일본은 식민지였던 조선의 소록도에도 한센병 치료 병원 자혜의원을 개원했어.

'환자심득서'. 심득, 마음에 새기라는 거야. 일본은 소록도의 모든 환자들에게 이걸 암기하도록 시켰어.
"입원환자는 치료상은 물론 위생 기타 동작 등에는 직원의 지시를 절대 준수한다."
"환자는 허가없이 일정구역 외로 나갈 수 없다."
"위 심득을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에 상당한 처분을 한다."
일본은 한센병 환자의 치료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환자를 강제 수용하기 위한 곳으로 소록도를 관리했어. 그리고 1933년, 악명높은 스오 마사토가 4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소록도 최악의 암흑기가 펼쳐져.

스오 원장은 소록도 자혜의원을 '소록도 갱생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센병 환자는 전국 어디에서든 발각되는 즉시 소록도로 강제 이송하도록 했어. 700명 정도였던 환자 수는 5,000 명으로 급증해. 이 많은 환자를 수용하려면 건물이 필요하잖아. 스오는 환자들을 동원해 건물을 신축하고, 도로를 확장했어. 치료하라고 강제 수용해 놓고, 강제 노역을 시킨 거지.
소록도 환자들의 분노도 쌓여가는 가운데, 스오 원장이 이번엔 환자들의 돈을 걷어 가기 시작해. 돈을 걷은 이유는? 자신의 동상을 건립한다고. 이 사진을 봐.

동상을 만드는 데 쓸 커다란 바위를 환자들이 옮기고 있는데, 그 바위 위에 남자 한 명이 우뚝 서 있어. 이 남자는, 스오의 양아들이자 오른팔이었던 사토야. 바위 위에 올라서서 일하는 환자들에게 채찍을 휘둘렀어. 이런 상황이 자랑스럽다는 듯 포즈를 잡고 사진 찍은 걸 봐.
얼마 후, 동상이 완성되자 스오 원장은 아주 성대한 제막식을 열었지. 그리고 매일 새벽, 환자들이 동상 앞에서 참배하도록 했어.


심지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군수품 생산에도 환자들을 동원했어. 연료로 쓸 송진 6,000kg, 가마니 30만장, 토끼 가죽 1500장, 숯 3만포를 매년 생산했다고 해. 그러다보니 환자들의 손발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병세는 나날이 악화돼. 가혹한 매질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생겨. 도주하려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거센 조류에 휩쓸려 물에 빠져 죽기도 했어.
만약에 소록도를 탈출하다 잡히면, 강제 단종수술을 시키는 거야. 한센병 환자들은 죽음조차 편안히 맞지 못했어. '환자심득서' 마지막 조항엔 이런 문구가 있어.
'27항. 학술 연구를 위해 시체 해부가 필요한 경우 이에 응해야 한다.'
소록도 사람들의 특별한 기도문이 하나 있었다고 해. '주님, 부디 저를 부르실 땐 주일날 불러 주소서'라고. 그럴 수만 있다면, 일요일에 죽게 해달라는 거야. 일요일엔 직원들이 쉬어서, 해부를 피할 수 있었거든.

"죽으면 무조건 해부를 다 해버려요. 그러니까 이제 공휴일 날 주일날은 해부를 안 해. 그러니까 죽더라도 해부 안 하고 화장하면 좋겠다. 그래서 그렇게 원을 해. 그러니까 이제 병들어 죽고 그냥 죽고 해부해서 죽고 세 번 죽는다고 그러잖아요. 그 누가 해부하는 걸 좋아하겠어."
-강선봉,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몇 년 뒤, 해방이 됐어. 일본 직원들은 다 떠나고, 소록도엔 우리나라 직원들이 왔어. 우리나라 직원은 일본 직원과 달랐을까? '환자심득서' 대신 우리나라 직원들이 만든 '소록도 환자 준수사항' 문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어.
'환자는 치료는 물론, 위생 기타 일상생활에 있어서 직원의 지시를 엄수하여야 한다.'
'부부동거는 정관수술을 받은 자에 한하여 이를 허가한다.'
'미감아동은 절대로 환자와 동거함을 엄금한다.'
'환자가 사망하였을 때는 학술 연구상 필요에 따라 사체를 해부할 수 있다.'
- 수용 환자 준수사항 中
한센병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해방 후에도 다를 것이 없었어. 시신 해부도 1960년까지 이어졌고, 한센인에 대한 강제 격리 정책은 1970년대까지 유지됐어. 낙태 수술은 1980년대 후반까지 공공연히 이루어졌고, 심지어 단종수술은 1992년까지 시행됐어.
그런데, 이런 의문 들지 않아?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정책들은, 한센병의 전염력에 대한 우려 때문이잖아. 옆에 서 있거나, 바람만 불어도 쉽게 전염된다고 생각했지. 그럼, 소록도에 근무했던 수많은 직원 중 한센병에 전염된 사람은 몇 명일까? 정답은 0명, 아무도 걸리지 않았어.
애초에 한센병은 전염력이 매우 낮아. 같은 3종 전염병인 결핵과 비교해도 2000분의 1 수준이야. 더구나 한센병 치료약도 있었어. 1940년대 초반 한센병 특효약인 DDS가 발명됐고, 1955년경에는 전국적으로 확대 보급됐어. 1958년, 동경 국제 나학회에선 '한센병은 완치된다'고 선언도 했어.
소록도에서도 1950년대 후반부터 치료약 덕분에 음성 환자가 늘고, 1960년대부터는 대부분의 환자가 완치되고 있었다고 해. 두 아이를 낙태시키고, 단종 수술을 받아야 했던 남철 씨와 월선 씨가 결혼식을 올린 게 1974년이었거든. 두 분은 이미 음성 판정을 받은 후였어.
▲ 소록도를 떠나지 못한 이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하기도 해. 1970년대에 강제 격리 정책이 폐지됐으니, 그렇게 힘든 소록도에서 나와도 됐던 거 아니냐고. 그러면 아이를 가질 수도, 지킬 수도 있었던 거 아니냐고 말이지. 그럼, 한센병 환자들이 소록도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직접 안 겪어본 사람들이 하는 소리예요."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건강하면 남의 일이라도 할 수 있지. 우리는 남의 일도, 누가 시켜줘요? 다른 한센 말고 장애자들 다 지금에 와서는 할 수 있어도, 우리 병 걸린 사람 중에는 직장 갖고 사는 사람 없어요. 안 받아주잖아."
-정월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한센병 환자란 낙인이 찍힌 순간, 평범한 삶은 사라져.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한센병 환자 가정으로 몰려와서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해. 가족들이 호적을 파버려서 호적이 없는 분들도 많아. 이발소, 목욕탕, 식당... 너무도 일상적인 장소에서도 한센병 환자들은 눈총을 받고, 쫓겨나곤 했어. 항구의 상인들은 한센병 환자들이 물건을 사면, 손 대신 집게로 돈을 받아서 바닷물에 담그는 사람도 있었대. 소독해야 한다면서 말이지.
한센병 환자들이 치료를 목적으로 어린이를 공격한다는 헛소문이 돌기도 해.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 알지? 초등학생 다섯 명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실종된 사건. 이때도 한센병 환자들이 범인이라는 허위 제보 전화가 들어왔어.

"성서초등학교 학생들이 실종되고 경북 경찰청 폭력계에 한 제보가 들어왔다. '나환자 수용소의 지하실에 매장되어 있으니 파도록 하라'… 00일보는 매우 구체적으로 '칠곡나환자촌 건물지하실에 실종성서국교생 5명 암매장'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 한센환자 관련 기사
차별과 편견으로 부풀려지는 헛소문. 허위제보 전화 한 통에 한센병 환자들을 의심하는 기사가 나왔어. 한센병 환자들이 항의하자 그들은 '한센병 환자들이 폭력적이다'는 기사를 덧붙여. 얼마 지나지 않아 한센병 환자와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어떤 곳에서도 사과나 정정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어.
현실이 이러니 한센병 환자들은 소록도를 나간다는 건 꿈도 못 꿔. 음성 판정을 받았어도, 그들에겐 여전히 한센병 환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으니까. 소록도를 나온 사람들이 살만한 정착촌이 전국 곳곳에 만들어졌지만, 주변 마을 사람들의 반대가 극심해. 정착촌 아이들과 자신의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 시위를 벌였지.
차별은 한센병 환자 2세까지도 이어졌어. 엄마가 꽁꽁 숨겨 낳은 인수 씨는, 본인은 병에 걸린 적이 없는데도, 한센병력자 자녀라는 게 알려지면서 취직도 어려워. 우리나라는 이미 1980년대에 한센병 퇴치 국가가 됐지만,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편견은 그 이후에도, 어쩌면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어.
▲ 치유를 위해 나선 사람들
2004년 5월. 서울의 한 변호사 사무실로 일본인 변호사가 연락을 해왔어. 소록도와 관련해서 한국 변호사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다는 거야. 일본인 변호사가 소록도를? 그것도 도움을 청한다? 대체 어떤 내용이었을까?
일본에 많은 한센병 환자들이 있었고, 우리보다 먼저 강제 격리의 피해를 당했다고 했지. 2001년, 일본의 한센병 강제 격리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어.

한센병 피해자에 대해 조사하던 일본 변호인단은 한국에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소록도 갱생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 그래서 한국 변호사들에게 연락했던 거야.

"정말 저희로서는 정말 놀랐죠. 그리고 좀 민망하기도 했고요. 나름은 그래도 우리가 인권 활동을 하고 있다고 조금 생각을 했는데 한센인들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고 무관심했다는 그런 내용. 일본 변호사들은 이렇게 오래전부터 그런 문제에 천착해서 이렇게 소송을 해서 승소하고. 한국에까지 와서 한국 피해자들에게까지 이런 활동을 하려 하고 있고. 좀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죠."
-박영립 변호사, 한센병 관련 소송 담당
피고는 일본 정부, 원고는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이야. 한센병 환자들로부터 피해 내용에 대한 진술을 듣고 증거를 찾아야 해.

"한국 변호사가 몇 사람이 나눠가지고 빠르게 요점만 정리해서 그걸 일본에 보내면, 공동작업을 직접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그 일본 변호사, 도쿠다 변호사님의 말씀이, 사실은 저희들이 좀 신선한 충격 같은 것을 받았는데. 이 진술서 작업을 하면서 그분들에게 진술할 기회를 드림으로써 그분들이 가슴에 가지고 있는 그 한을 풀어내고, 조금이라도 치유의 기회를 드리고 회복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드리는 것이 또 중요하다… 승소를 받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과정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박영립 변호사, 한센병 관련 소송 담당
일본 변호사들은 진술서 작업을 위해 한 달에 한두 번 소록도를 꾸준히 찾았다고 해.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와서 녹동항까지 버스와 택시를 타고 이동하고, 또다시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로. 힘든 여정일텐데도 3년을 쉬지 않고 찾아왔어. 일본 변호사들은 오히려 "가해자가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아 준 소록도 주민들에게 감사하다"고 했대.

그때마다 우리 한국 변호사님들도 함께 했지. 그들과 포옹하고, 손을 잡으며, 그동안 아무도 피해라고 말해주지 않았던, 그들의 피해 사실을, 일생을, 기록하셨어.

"변호사들이나 그런 분들이 우리를 찾아서 가까이 하고 그러니까, 우리 인권이 살아나더라고.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그러니까. 인간 대접받은 거… 가장 행복해요."
-이남철, 한센병력자, 소록도 거주
우여곡절 끝에 2006년 일본 정부는, 일제 강점기 소록도에서 강제 격리, 강제 노역으로 피해를 본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들에게도 피해 보상을 하기로 결정했어.
그렇게 우리나라 정부에 대한 국가 배상 청구 소송도 진행됐어. 1심 재판부는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어. 하지만 우리 정부는 판결 보름 만에 항소했어. 낙태와 단종수술은, '당사자들의 동의를 받은 것으로 강제성이 없었다'고 주장했어.
소록도 사람들은 말해. "소록도에 살기 위해서는 낙태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라고. 그렇게 재판은 2심에 3심까지 이어졌어. 그리고 6년 만에, 마침내 '정부는 단종 낙태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어.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는 생명권과 더불어 인간 생존의 기본적 권리이며, 신체의 자유 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또한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하고,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할 의무가 있으며,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도록 되어 있다."
-판결문 中
▲ 소록도에 없는 두가지
소록도엔 두 가지가 없다는 말이 있어. 바로 '아이'와 '무덤'이야. 소록도에서 생을 마친 환자들은 화장 후 '만령당'이란 곳에 안치돼. 10년간 유골을 찾아가는 사람이 없으면, 만령당 뒤 봉분에 합장돼. 자식이 없는 분이 많다 보니까, 지금 그 곳엔 1만기가 넘는 유해가 잠들어 있어.


한센병은 완전히 정복된 병이야. '리팜피신'이란 항생제를 한 번만 복용하면 나균의 전염력이 99.99% 없어져. 결핵이나 성병 등과 달리 유독 한센병에 대해서만 강제격리정책이 시행됐던 이유는, 다른 전염병과 달리 외모에 변형이 생겼기 때문일 거야. 눈에 보이는 것에 따른 차별과 편견. 지금, 우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 5시간 차를 타고 가면 소록도까지 이어져. 2009년 소록대교가 완공돼서 차로도 갈 수 있거든. 현재 소록도는 주민 거주지 외엔 누구나 방문이 가능해. 지금 소록도에 계신 분들은 모두 한센병이 완치된 분들이고, 전염력도 없는 분들이야. 힘겨운 인생이 담겨 있었지만, 고향이 되어버린 소록도에서 여생을 보내고 계신 분들. 이제라도 그분들이 편안한 시간을 보내실 수 있길 기원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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