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정리하며 ‘올해의 한순간’으로 꼽고 싶은 12월 둘째 주 그 밤을 다시 떠올린다. 노벨상 시상식과 광장의 분노를 밤새 번갈아 보던 그날은 최고의 시간이자 최악의 시간이었다. 희망과 자부심의 순간이었고, 절망과 한숨의 시간이었다. “현대 크리에이티브 세계의 중심지”이자 “소프트파워 패권의 글로벌 경쟁에서 최근 몇 년간 가장 확실한 승자”로 칭송받던 나라의 정치적 몰락. 계엄과 국가 폭력을 기록한 소설로 한강 작가가 세계의 존경을 받던 그때, 또 다른 계엄이 현실의 배경으로 등장하며 과거와 현재, 문학과 현실이 기묘하게 교차되던 순간. “오징어게임 시즌 2의 기대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계엄이라는 현실판 디스토피아가 끼어들었다”는 해외 언론의 묘사를 씁쓸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
노벨상 기쁨 짓누른 계엄의 밤
밤샘 익숙한 K팝 팬덤의 반전
놀이와 결합 창의적 저항 문화
“K팝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만들어지는 동안 쌓아왔던 자부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절망도 잠시, K팝과 팬덤은 희망과 회복의 근거를 제공하며 반전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광장에서 분노의 함성과 힘찬 주먹질, 그리고 8년 전 탄핵집회의 촛불마저 대신하여 등장한 것은 형형색색의 응원봉이었다. K팝 콘서트장에서 스타를 향해 내밀던 애정의 상징이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을 비추는 불빛으로 새로운 의미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죽은 자가)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음울한 비장미 대신,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 /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 /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제 안녕”이라는 ‘다시 만난 세계’의 경쾌한 리듬과 멜로디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발랄해진 시위의 모습에 진입 장벽은 낮아졌고, 더 많은 이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저항은 그렇게 놀이와 결합했다.
K팝 팬덤의 주역인 젊은 여성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하며 창의적인 저항 방식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상상력을 펼쳐 보였다. 광장의 K팝 플레이리스트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운동권 세대와 촛불 세대에게 전파되었고, 사람이 부족한 곳을 알리면 즉시 달려가기도 했다. 팬들은 ‘선결제’로 먹을 것과 방한용품을 마련하고, 그것들의 정보를 다시 앱에 공유했다. 이에 팬들을 걱정하던 스타들까지 선결제 ‘역조공’에 동참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번 참여 경험을 나누며 시선을 사회의 다른 영역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이런 장면들은 K팝과 K컬처의 팬덤이 단순히 음악이나 드라마, 영화 같은 장르의 팬클럽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정치적 실천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이미 응원봉과 K팝 시위는 대만 등 몇몇 나라로 전파되었다.
팬덤의 현재는 과거의 오랜 고생 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 팬덤은 스스로를 “시위에 특화된 인력”이라 말한다. “꺼지지 않는 불(응원봉)을 하나씩 갖고 있고, 아이돌 응원법으로 소리 지르는 데 익숙하고, 방송사 사전 녹화 경험 덕분에 사계절 야외에서 밤샘이 가능하며, 심지어 여의도 화장실과 맛집도 잘 아는, 슬프지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인권 유린’에 단련된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실제로 ‘빠순이’ ‘오빠부대’ 같은 멸칭에서 출발했지만, ‘덕후’나 ‘휀걸’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점점 더 똑똑하게 진화했다. 단순한 스타 문화상품의 소비자였던 초창기에서 벗어나 아이돌 그룹의 멤버를 직접 뽑아 데뷔시키고, 온라인에서 적극적으로 기획 의견을 내며 아이돌과 함께 성장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미국에 전파된 팬덤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팬덤 ‘아미’를 대표로 BTS 등을 세계적 스타로 정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응원하는 아이돌이 처한 불공정한 환경, 미국 흑인 인권운동, 태국 민주화 시위에 맞서는 목소리를 내며 적극적으로 행동해왔다. 팬덤은 연예 산업의 기득권이 만들어낸 부조리를 극복하려 애썼고, ‘뭉치면 바꿀 수 있다’는 경험을 통해 효능감을 체득했다. 그렇게 쌓아온 팬덤의 저력과 경륜, 에너지가 정치의 모순에 맞서 방향을 전환했을 때, 이처럼 창의적인 저항과 외침의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팬덤 세대’는 K팝을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세우고, 이제는 사회와 정치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상상력을 K팝에 더했다. 머지않아 K팝이라는 말을 세계인들이 떠올릴 때, 단순히 ‘한국에서 비롯된 예술의 장르’를 넘어 민주주의를 지켰던 든든한 기반이라는 의미까지 함께 떠올리게 될 것 같다. K팝은 음악과 춤을 통해 저항의 언어를 새롭게 정의하며, 발랄한 리듬 속에 진중한 메시지를 담아 광장을 물들인 멋진 배경음악으로 역사가 기록할 것이다.
‘계엄’ 정치는 시대를 거스르려 했지만, 광장의 노래는 다시는 비장해지지 않을 것 같다. ‘경쾌한 저항’이라는 시대적 징후는 더 이상 뒤로 물리기 어려울 것이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