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청해부대의 ‘아덴만 여명 작전’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소말리아는 한국사회에 오랫동안 내전과 인도적 위기, 불안정의 이미지로만 소비됐다. 지금 소말리아에서 진행 중인 재건과 회복의 과정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소말리아는 2023년 말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채무 탕감을 받으며 국제 금융 시스템에 복귀했고, 2024년에는 동아프리카공동체에 가입했다. 여전히 반정부 무장단체의 위협은 계속되고, 재건 속도는 느리다. 그럼에도 소말리아의 회복과 재건을 응원하는 세계의 관심은 이어지고 있다. 디지털 헬스 스타트업 ‘오고우 헬스(OGOW Health)’의 칼리드 하시(Khalid Hashi) 대표가 붙잡으려는 것은 이 복잡한 재건 과정에서 조용히 사라져가는 이름 없는 산모와 아이들의 생명이다.
내 건강 기록이 ‘A마을 백신 1건’으로만 남을 때
소말리아계 캐나다인인 칼리드는 2017년 아픈 할머니를 뵙기 위해 부모의 나라 소말리아를 처음 방문했다. 그가 병원에서 마주한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한 페이지에 환자 100명을 관리하는 장부였다. “그것은 애초에 ‘사람의 건강’에 대한 기록이 아니었어요. ‘한 달에 말라리아약을 몇 개 사용했는지’ 같은 숫자를 집계하기 쉽게 100명짜리 표를 만들어서, 사용한 의약품을 체크하는 거였습니다.” 칼리드 대표가 보기에 당시 소말리아에서 쓰이던 의료 기록은 사람의 건강 상태를 추적하기보다는 병원의 의약품 재고 장부에 가까웠다.
다양한 국가와 국제단체의 지원 시스템, 물자 배분 체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이를 각 지역에 효율적으로 배포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소말리아의 의료 시스템에서는 자연스럽게 ‘개인의 건강 기록’은 뒷전이 됐다. 그 대신 ‘제공받은 의료품을 얼마나 적당한 곳에 잘 썼는지’를 보고하는 일이 가장 중요해졌다. 그러다 보니 진료실에 찾아오는 사람의 건강이 아니라 사용된 의약품이 기록에 남은 것이다.
가뜩이나 불안정한 환경에서 이 시스템은 치명적이다. 산모의 검사 일정이나 아기의 예방접종을 챙기는 것은 개인의 역량에 맡겨진다. 공적인 기록 속에는 그저 ‘2025년 11월, A 마을 말라리아 예방주사 30건’ 같은 숫자만이 남는다.

칼리드가 할머니와 함께 간 병원에서 이 장면을 처음 목격하고 떠올린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내가 이 병원에 컴퓨터를 1대 기부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하지만 캐나다로 돌아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고민은 훨씬 깊어졌다.
“그냥 컴퓨터만 준다고, 그 병원에서 갑자기 개인별 건강기록을 남기게 될까? 그게 과연 지속 가능할까?” 친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애초에 병원이 ‘의약품 재고 장부’ 같은 방식으로만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은 정부와 지원단체가 요구하는 정보가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개인별 기록을 남길 유인도, 경험도, 시스템도 없는 상태에서 새 컴퓨터 1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먼지 쌓인 장비’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직감했다.
그는 ‘전자 의료 기록 시스템’을 만들기로 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모집했고 보건 전문가, 개발자, 소말리아 활동가들과 함께 모임을 만들 수 있었다. 소말리아와 세계의 병원들을 돌며 시스템을 견학했고,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모금도 시작했다. 그들이 만든 첫 데모 버전을 무료로 배포하기 시작하자 두 달 만에 100개가 넘는 데모 요청이 쏟아졌다. “단체 웹사이트도 없었는데 입소문만으로 e메일이 쏟아졌어요.”
실험적인 작은 단체였던 ‘오고우 헬스’는 초기 개발 단계에서 고전했다. 의료 기록 시스템은 생각보다 복잡했고, 그것을 소말리아 보건 시스템에 적용하는 과정은 더더욱 복잡했다. 그들의 고전분투는 세계적인 디자인 컨설팅 기업 IDEO의 눈에 띄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들이 우리에게 기부를 제안하면서 받은 첫 지시사항은 정말 의외였어요. IDEO는 ‘지원금을 줄 테니 최대한 많이 실패해 보세요. 우리가 보고 싶은 건 결과가 얼마나 대단한지가 아니라, 지역사회로부터 얼마나 많은 피드백을 주고받고 이를 통해 얼마나 고쳤는지입니다’라고 했죠.”
오고우 헬스팀은 그 뒤로 1만5000명이 넘는 간호사, 의사, 환자, 보호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폰 사용자를 전제한 첫 앱은 통째로 갈아엎었다. 소말리아에서 많이 쓰이는 노키아 폰을 기준으로 화면을 다시 설계하고, 통신이 없는 지역에서도 작동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의료진이 사용할 시스템에만 집중했어요. 그런데 현장의 목소리가 명확했어요. ‘어차피 기록이 여기 있어도, 환자들이 병원에 올 수 있어야 의미가 있지 않겠냐’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예방접종·진료 일정을 문자와 음성메시지로 알려주는 기능도 개발했어요.”

멜린다 게이츠 재단, 구글 포 스타트업(Google for Startups) 등 여러 큰 재단의 후원이 이어진 덕분에 오고우 헬스는 모험적인 실험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결과 오고우 헬스는 단순한 진료 기록 시스템을 넘어 소말리아 보건 시스템 전반을 잇는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병원의 의료 기록, 정부의 의료품 배포 기록, 구호단체의 지원 기록, 환자의 진료 기록과 알림 기능이 연동되고, 더 나아가 영양실조 아동에게 지급되는 치료식의 배포 상황까지 추적·기록한다. 오고우 헬스는 현재 소말리아 전국의 산모·영유아 클리닉을 잇는 핵심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으며, 소말리아 정부는 물론 유니세프, 세이브더칠드런, 월드비전 등 45개 이상의 국제기구와 협력하고 있다.
칼리드 대표와 오고우 헬스는 그들의 일을 ‘종이 위에 흩어져 사라지던 사람을 다시 이어붙이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의 일은 단편적으로 ‘얼마나 많은 혜택을 전달했는지’에 집중하는 환경에서는 인정받기 어렵다. 많은 기부자와 재단, 심지어 공익활동가들조차 환산하기 쉬운 숫자에 성과를 가두려 한다. 몇개의 물건을 배포했는지, 캠페인을 몇 번 했는지, 심지어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인지’가 보고서의 언어가 된 지 오래다.
이런 관점의 지원이 이전 소말리아의 의료 기록처럼 ‘100명에게 쓰인 의료물품 합계만 기록하는’ 시스템을 낳는다. 한국에서도 공익활동, 공공 서비스, 기부는 가장 숫자로 환산하기 쉬운 곳에 집중된다. 오고우 헬스의 여정이 가능했던 것은 칼리드 대표의 훌륭한 생각과 용기 덕분이기도 했지만, ‘결과를 가져오지 말고 최대한 실패한 과정을 가져오라’는 통 큰 투자 덕분이기도 했다. 소말리아의 재건과 아이들의 건강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의 염원이 기적을 만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