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 년 전만 해도 유럽연합(EU)처럼 목적의식을 지닌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을 향한 염원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이 명제에는 어떤 가치를 기반으로 할 것이냐는 질문이 늘 따라붙었다. EU는 포괄적인 민주주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지만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의 아시아는 훨씬 더 다양한 정치 체제가 모인 지역이다.
당시 일각에서는 서구가 강요하는 분열적인 정치 이념에서 벗어나 광의의 아시아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시아적 가치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를 파헤쳐 보려고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10개국에서 오피니언 리더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중국과 싱가포르를 제외한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 인권,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굿 거버넌스에 대한 상당히 강력한 지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국의 석학과 외교관들은 민주주의는 아시아 문화에 적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한국·일본 등이 민주주의 주도
민주주의 국가 간 파트너십 중요
한국의 역내 리더십 유지돼야

그러나 지난 40년 동안 수많은 국가의 민주화 과정을 보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동시에 과거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에서는 주권에 대한 강한 민감성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 민주주의 지지 기반 조성을 위해 역내 대다수 국가가 공동의 접근 전략을 어떻게 수립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20여 명의 인·태 지역 민주주의 국가의 민주적 거버넌스 전문가들이 모여 연례 회의를 하는 ‘써니랜드 이니셔티브(Sunnylands Initiative)’가 출범했다. 2020년 미국 캘리포니아 써니랜드에서 첫 회의를 열었고 이후 한국·일본·호주를 거쳐 최근에는 인도네시아에서 회의했다.
올해 회의에서는 민주주의와 책임감 있는 정부를 열망하는 대다수 아시아인에게 좋은 소식과 함께 나쁜 소식도 전해졌다. 2024년은 사상 최고로 많은 선거가 치러진 해였다. 인도네시아·일본·미국·인도에서는 선거가 폭력 없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져 평화로운 권력 이양이 있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와 미국에서 선출된 권력은 안타깝게도 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의식이 낮고 권력 집중에만 혈안인 경우가 많다.
이번 인도네시아 회의를 통해서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가 이제는 더 이상 미국이 아니라 역내 국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한국과 일본이 특히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 의회에 ‘민주주의 의원 모임’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역내 민주주의 거버넌스 지지와 민·관 자금 지원을 위한 ‘인도·태평양 민주주의 포럼’을 출범했다.
이런 노력은 미국민주주의재단(NED)이나 비영리 단체인 프리덤하우스의 기존 활동을 보완하며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도서국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트럼프 2기 정부가 민주주의, 개발 및 인권 활동을 급작스럽게 제한하는 조치에 대해 큰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의 정책들이 항상 역내에 부합해 온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부재를 악용한 중국이 아시아적 가치에 민주주의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펼칠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함께 했다. 한국의 국내 정치적 위기가 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그동안 한국 정부의 대외 정책을 후퇴시킬 것인가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국 민주주의에 위기를 불러온 것은 사실이지만 윤석열 정부가 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지지 등 모든 외교적 사안에서 역내 한국의 위상을 높여온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대외 정책이 후퇴하면 역내 민주주의 강화를 위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인·태 지역에서 유사한 입장을 갖고 있는 국가들의 민주주의 파트너십은 여전히 중요하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민주화를 통해 굳건한 민주주의 제도, 존경받고 강력한 군, 튼튼하고 혁신적인 경제를 구축한 모범적 사례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역내 리더십이 국내 정치 상황으로 인해 약화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미국 마저 국내 정치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 역내 국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 한국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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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국 CSIS 키신저 석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