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발 디딘 인간…그 후 초식 유대류가 사라져갔다

2024-10-02

몸집 큰 디프로토돈·지고마투루스

날지 못하는 300㎏ 새 게니오르니스

한때 호주 평원 누볐던 유대류 45종

4만년 전부터 서서히 멸종하기 시작

인류가 호주에 도착한 시기와 맞물려

일부선 기후변화 탓으로 분석하지만

포유류 인간 등장이 생태 변화 유발

오스트레일리아의 동물을 열거해보자. 먼저 배에 있는 주머니에서 새끼를 키우는 유대류가 떠오른다. 두 발로 뛰어다니는 캥거루, 나무 위에서 졸고 있는 코알라, 정육각형 똥을 누는 웜뱃, 항상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쿼카. 알을 낳는 포유류인 단공류, 오리너구리와 가시두더지도 빼놓을 수 없다. 모두 왠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포유류다. 예전에도 그랬을까? 마지막 빙하기인 4만년 전 풍경을 상상해보자.

유칼립투스 향과 축축한 흙냄새가 흐르는 공기는 시원하고 상쾌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숲의 고요는 여명과 함께 사라졌다. 누군가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울창한 덤불이 바스락거렸다. 코뿔소만큼이나 거대한 몸집을 한 포유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포유류이니 유대류일 테다. 거대한 양치류 가지가 꺾이고 그의 몸에 부딪쳐 부러지고 발에 밟혀 바스러졌다.

4만년 이전의 메가파우나

이 낯선 유대동물의 이름은 디프로토돈(Diprotodon)이다. 주둥이 끝에 돋아난 두 개의(di) 커다란 앞(proto)니(odon)가 특징이다. 오늘날의 웜뱃과 코알라 이빨 구조와 비슷하다. 디프로토돈은 웜뱃과 같은 조상에서 진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몸집이 작고 굴을 파는 생활에 적응한 웜뱃과 달리 디프로토돈은 커지는 방향을 택했다. 길이 4m, 체중은 2~3t에 달했다. 250만년 전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홍적세)에 등장하여 습지, 초원, 산림 환경에서 살다가 4만년 전에 멸종했다.

디프로토돈의 생태적 지위는 아프리카의 코뿔소에 해당했다. 그렇다면 하마에 해당하는 유대류도 있었을까? 왜 없겠는가? 지고마투루스(Zygomaturus)가 그것이다. 약 800만년 전 신생대 제3기 마이오세 후기에 등장하여 4만년 전에 멸종했다. 체중 0.5~1t, 어깨 높이 1.5m, 몸길이 2.5m에 이른다. 다리는 짧고 굵직한 편이었다. 머리는 크고 넓었지만 대형 유대류들이 그렇듯이 두개골 안에 커다란 부비동이 있어서 머리의 무게는 보기보다 가벼웠다. 물가 주변의 식물을 섭취하며 살았다.

거대한 초식 유대류에는 어떠한 천적이 있었을까? 가장 위험한 포식자 후보는 육식 유대류인 주머니사자, 틸라콜레오(Thylacoleo)였다. 마치 아프리카 초원 생태계에서 최고 포식자인 사자와 같은 생태적 지위를 갖는다는 뜻으로 이름에 사자가 들어있지만 실제로 사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동물이다. (검치호랑이가 호랑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과 같다.) 나무 위에 숨어있다가 먹잇감을 기습 공격했다. 틸라콜레오는 마치 공룡 데이노니쿠스처럼 앞발 엄지에 접을 수 있는 커다란 발톱과 특수한 이빨이 있어 살을 잘게 찢어 먹었다.

거대한 새 게니오르니스(Genyornis)도 두려운 존재였다. 턱(genyos)과 새(ornis)가 합쳐진 이름이니 우리말로 하면 ‘턱새’ 정도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늘을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키는 2m가 넘고 체중은 평균 300㎏ 정도였기 때문이다. 체중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날지 못하는 새였다.

위협적인 파충류 천적도 있었다. 4만년 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던 왕도마뱀 메갈라니아(Megalania)도 그 가운데 하나다. 메갈라니아는 체중 1.9t, 몸길이 7m에 달했다. 현생 코모도왕도마뱀이 체중 170㎏, 몸길이 3m인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동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주로 물에서 생활하는 현대 악어와 달리 고대 오스트레일리아 악어 쿠인카나(Quinkana)는 육지에서 살며 사냥했다. 긴 다리와 날카로운 이빨로 커다란 먹이를 사냥하는 포식자였다. 특히 물을 마시러 오는 동물을 사냥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거대 유대류 역시 물을 먹어야 했고, 특히 지고마투루스는 물가에 살았으므로 쿠인카나가 매우 큰 위협이다.

그런데 이런 포식자들이 디프로토돈과 지고마투루스를 실제로 얼마나 잡아먹었을까? 이럴 때는 현생 생태계에서 배울 수 있다. 사자가 하마나 코뿔소를 사냥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는가? 없다. 그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무 위에서 기습하는 틸라콜레오, 무시무시한 크기의 메갈라니아, 물가에 잠복한 쿠인카나, 재빠른 게니오르니스 모두 디프로토돈이나 지고마투루스를 쉽게 위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크기와 힘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끼, 병들고 부상당한 동물, 고립된 개체는 쉽게 주머니사자를 비롯한 포식자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고 덕분에 개체수가 적절히 조절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거대한(mega) 동물(fauna)들을 간단히 메가파우나로 부르자.

작은 태반포유류의 등장

아침 이슬을 맞고 걷던 디프로토돈은 걸음을 잠시 멈추고 크고 납작한 이빨로 거친 풀을 갈아 먹으며 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다. 사방에 포식자가 널려 있었지만 덩치가 커다란 그에게 세상은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곧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디프로토돈은 알지 못했다. 디프로토돈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메가파우나들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보다 몸집은 보잘것없지만 훨씬 더 교활한 포식자가 숲 그림자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낯선 포유류가 발을 디딘 것이다. 그들은 포유류지만 놀랍게도 배에 새끼주머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오리너구리처럼 알을 낳는 것도 아니었다. 유대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커다란 새끼를 낳고 두 팔로 안아 젖을 먹이고 등에 업고 다니는 태반포유류였다. 바로 이족보행 호모 사피엔스다.

대략 4만년 전 어느날 아침의 풍경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하자마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메가파우나가 사라지고 만다. 디프로토돈, 지고마투루스, 틸라콜레오, 메갈라니아, 쿠인카나, 게니오르니스가 거의 같은 시기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사라졌다. 그렇다면 고대 오스트레일리아 거대 동물의 멸종 책임은 인류에게 있는 것일까?

우리는 자연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그 책임을 지려고 한다. 자연과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경향이 있다. 책임감일 수도 있고 오만함일 수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메가파우나 멸종에 관한 초기 연구는 인간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연구자들은 기후변화가 오스트레일리아의 거대 동물이 사라진 이유라고 주장할 여지가 거의 없으며, 인간의 사냥이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남았다고 결론지었다.

납득하기 쉽지 않다. 거대한 대륙에 분포한 메가파우나들이 인간에 의해 사라지려면 충분히 많은 인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호주 원주민 인구는 선사시대 훨씬 후대까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게놈 연구에 따르면 4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는 인구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얼마 되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그 많은 동물을 다 잡아먹었겠는가.

물론 인구는 별로 없지만 인간이 불을 이용해 숲을 태우고 새로운 서식지를 개척하면서 메가파우나의 서식지가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설사 기후변화가 원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제한적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평야의 물이 줄어들자 거대 동물과 인간 모두 호수 주변에 몰려들 수밖에 없었고, 좁은 지역에 밀집한 메가파우나는 인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기후변화냐, 인류의 위협이냐?

그럴싸한 이야기지만 이것을 증명하려면 원주민이 거주한 곳에서 메가파우나의 화석을 찾아 연대측정을 해야 한다. 화석의 연대를 측정하는 기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당연히 여러 가지 기법을 적용하면 가장 정밀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연대 측정 기법이 비슷한 날짜에 도달한다면 이는 해당 종의 연대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답을 줄 수 있다.

만약 인간이 도착한 직후 거대 동물이 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인간에 의한 급속 멸종 모델이 힘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거대 동물이 인간이 등장하기 오래전에 멸종했다거나 반대로 오랜 세월 동안 인간과 공존했다면 거대 동물의 멸종에 대한 설명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원주민의 흔적과 메가파우나의 뼈가 함께 잘 보존된 지역이 거의 없지만 1981년 세계자연유산 목록에 오른 뉴사우스웨일스의 윌랜드라 호수 지역은 예외다. 여기서는 홍적세에 형성된 호수와 모래층에서 발견된 화석들과 함께 (4만년 전이 아니라) 5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남긴 고고학적 흔적이 발견된다.

드디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컸다. 안타깝게도 윌랜드라 호수 지역에서 발견되는 거대 동물 화석에는 콜라겐이 탄소 연대 측정이 가능할 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침내 1980년대가 되어서야 동물학자와 고고학자에 의해 독립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상태가 좋은 지고마투루스 화석이 발견되었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 멸종 연대는 약 3만3000년 전. 이것은 지고마투루스가 최소한 1만7000년 동안 인류와 공존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3만3000년 전은 지고마투루스의 마지막 연대가 아닐 것이다. 발견된 것 중 최후의 것일 뿐이다. 인류에 의해 멸종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이유를 기후 조건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인류가 진출한 게 5만년 전인지, 4만년 전인지 불분명한 것처럼 메가파우나 표본에 대한 탄소 연대 측정의 정확성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4만~5만년 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45종여의 메가파우나 중 상당수가 사실은 최초의 인류 도착 이전에 이미 멸종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도대체 오스트레일리아 메가파우나의 멸종 원인은 기후변화인가, 인류 활동인가? 현재 가장 유력한 가설은 기후변화와 인간 활동의 상호작용이 메가파우나 멸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주기적인 가뭄으로 인해 일어난 먹이 식물상의 변화로 이미 스트레스를 받던 메가파우나가 인간의 사냥과 불 사용으로 멸종 속도가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디프로토돈은 이미 건조해진 환경에서 인간이 사용하는 불로 인해 서식지가 더욱 줄어들고 먹이 경쟁이 심화되면서 생존이 어려워졌다. 인간의 대규모 사냥보다는 인간이 가져온 새로운 질병이 메가파우나의 멸종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적어도 인류가 등장한 이후 발생한 사소한 변화가 생태계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현생 생물도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인간의 작은 행동이 그들에게는 커다란 파도가 될 수 있다.

■필자 이정모

여섯 번째 대멸종을 맞고 있는 인류가 조금이라도 더 지속 가능하려면 지난 멸종 사건에서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연세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생화학을 공부하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유기화학을 연구했지만, 박사는 아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서울시립과학관,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대중의 과학화를 위한 저술과 강연,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과학이 가르쳐준 것들> <과학관으로 온 엉뚱한 질문들> <살아 보니, 진화> <달력과 권력> <공생 멸종 진화>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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