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에도 멸구가 붙어있다

2024-10-01

수확을 앞둔 논들이 벼멸구의 침공에 초토로 변했다. 흡사 폭탄을 맞은 듯 군데군데가 움푹움푹 꺼졌다. 추석 전에는 황금색으로 출렁이던 들녘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중국에서 바람을 타고 건너온 벼멸구는 가장 먼저 호남 들녘을 유린했고, 그 피해가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임실지방은 70%가 넘는 논이 멸구 서식지로 변했다.

임실군 오수에서 농사를 짓는 최영록 생활글 작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서울에서 추석을 쇠고 내려와 보니 자신의 논이 온통 붉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새벽 들판에서 가슴을 쳤다.

“이 노릇을 어쩐다냐. 그냥 논바닥과 농로에 주저앉아 하늘이나 원망하며 몇 시간이든 통곡이라도 할거나? 보느니 처음이고 듣느니 처음이다. 혹자는 30년 만의 재앙이자 재난이라고 한다. 그 더웠던 여름날 논두렁 풀을 깎고 풀약을 친 게 억울하다. 에이, 풀이고 농약이고 다 내비둬버릴(내버려둘) 것을, 하는 생각이 어찌 들지 않겠는가. 살충제, 제초제, 이삭거름, 비료, 수도 없이 물꼬를 본 그 세월과 그 지극정성이 슬프고, 또 거기에 들어간 비용조차 건질 수 없다는 현실이 슬프다. 오호통재, 에라이 모르겠다. 한잔 술에 시름 잊고 ‘한탄가’나 불러보자.”(최영록 <찬샘별곡>)

자신이 키운 나락을 어찌 돈으로만 환산할 것인가. 피 뽑고 김매고, 쓰다듬고 보듬고, 거름 주고 약 뿌리고, 맘 졸이며 애태워 벼를 키웠을 것이다. 논농사는 그저 먹거리만을 생산해내는 단순 노동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검증한 기술로 쌀을 생산했다. 검은 땅에서 푸른 생명을 피워 올리는, 햇빛과 바람과 물에 땀과 정성을 섞는 경이로운 기술이었다. 그래서 여러 고비를 넘기고 풍년을 맞으면 가슴이 벅찼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허수아비 춤을 보면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귀향 5년차 농부 최 작가는 농사를 알아갈수록 농사짓기가 힘들었다. 그런 차에 자신의 논이 멸구에 파먹히자 기가 질렸다. 평생 농사만 지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 음성이 들려왔다. “겸손해라. 농사는 하늘이 짓는 것이여.” 그랬다. 인간은 최선을 다할 뿐 마지막은 하늘이 보살펴야 풍년이 든다. 그렇다면 하늘은 여전히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갑자기 무서워졌다. 이러다 벼농사의 종말이 오지 않을까. 이런 이상기후가 계속되면 누가 농사를 짓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시국이 수상한 판에 논농사를 포기하는 농민들이 속출하지 않을까.

역대 정권은 농민과 농촌을 무시했다. 농정이라는 게 농촌을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이미 20년 전에 이중기 농민 시인은 차라리 ‘한국농업을 순장하라’고 외쳤다. “아버지는 잘못된 역사 발전에 백의종군 하느라/ 궁상한번 없이 죽어라 땅만 파던 땅강아지였다./ 나달나달해진 경전, 내게 논밭을 물려주신/ 아버지 무덤에 1인 시위하러 간다.”(시 ‘농업만년설이 무너져 내린다’ 중에서)

변한 것은 없다. 농정에도 멸구가 붙어있다. 농업정책이 영농 의욕을 빨아먹고 있다. 쌀값 하락을 방관하고, 벼농사 포기를 종용하고 있다. 그렇게 농업은 나라경제의 걸림돌이 되었고 농민은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이에 맞서 농민들은 농한기에도 신선이 될 수 없었다. 논과 농촌을 지키는 ‘겨울 투사’가 되어야 했다. 그마저도 해마다 되풀이되는 시위에 지쳐 그 열기가 점점 식어가고 있다.

우리네 들녘에서 신명이 사라지고 경건함이 엷어지고 있다. 수시로 이상기온과 기상이변이 들판에 몰아치고 있다. 가을 폭염은 추석을 ‘반소매 명절’로 만들었고, 앞으로는 어떤 재앙을 몰고 올지 알 수가 없다. 해마다 가을 폭염이 계속된다면 농사짓기가 어려울 것이다. 농민들은 이미 들녘의 바람결이 달라졌음을 체감하고 있다. 온갖 해충이 창궐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다.

예전에 이 같은 벼멸구 피해가 발생했다면 국가 차원의 재앙으로 여기고 온 국민이 함께 걱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에서도 그저 지나가는 뉴스로 취급하고 있다. 벼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듯이 들녘도 인간들의 노래를 들으며 편히 잠들 것이다. 앞으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계절을 벗어난 이상기온이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다행히 찬비가 내렸다. 찬바람이 불면 벼줄기의 즙을 빨던 멸구 주둥이가 삐뚤어질 것이다. 저 들녘이 무사하기를, 그래서 아름다운 생의 변주가 끊기지 않기를 기원한다. 들녘이 평화로워야 나라가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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