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세계 명상의 날, 렛잇비

2025-12-19

“밤이다. 이제 솟아오르는 모든 샘물이 소리 높이 외친다./ 내 영혼 또한 솟아오를 샘물이다.// 밤이다./ 사랑하는 이들의 모든 노래가 이제 비로소 깨어난다./ 내 영혼 또한 사랑하는 자의 노래다.// 진정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내 안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밤의 노래’다. 사랑하는 이들의 노래가 깨어나는 밤을, 그 밤의 고독을 사랑하는 자에게 진정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니체 스스로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고독에 대한 찬가’라고 명명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혹 그것은 고독을 감당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명상은 마음에 귀기울이는 공부

주변이 어두워져야 비로소 보여

분주하고 소란한 연말연시 맞아

마음 정원 돌볼 고독의 시간 필요

밤이 길다. 동지가 가깝다. 동짓달 기나긴 밤들을 당신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 지. 여전히 밤낮없이 바쁜지, 아니면 고독을 배우는 지. 감당하지 못하는 고독은 고립인데, 또 고립의 터널을 거치지 않는 고독은 없으니 이렇게 묻게 된다. 지금 당신은 종종, 내면에서 올라오는 밤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는지. 또 종종,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샘 같은 에너지에 호응하는지.

12월 21일, 유엔이 정한 세계 명상의 날이다. 그런데 왜 12월 21일일까. 밤이 가장 긴 날, 그래서 비로소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을 선택한 것이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동지는 일양(一陽)이 싹트는 날이기도 하다. 충만한 음의 세상에서 양의 싹이 움트는 날, 다시 시작하는 날인 것이다.

그런데 의아하다. 유엔이 명상의 날을 만들다니?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이 터지는 전쟁, 전쟁 같은 기후위기, 전쟁 같은 갈등상황, 그 와중에 열심히 애쓰며 살았지만 늘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우리네 삶, 정신없이 흘러가는 세계는 엄청난 문제를 만들어내고, 그 문제들은 우리들이 집과 직장과 이기적인 관계에만 관심을 두는 사이 누진적으로 증폭되고 있다. 문제는 사람이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화제가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드라마는 ‘서울 자가’에, ‘대기업’으로 요약되는 사회적 성공이 실은 허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완벽한 허상이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깨닫게 될 때까지 우리는 그 허상을 좇는다. 왜 그러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자가, 좋은 직장이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울타리 안으로 진입하지 못할 때 찾아드는, ‘밀려난 느낌’인지도.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 부정당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 느낌이 핵심인 것이 아닐까.

그 느낌을 억압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주시해야 한다. 명상을 통해 그런 느낌을 주시하는데 익숙해지면 그런 느낌에서 생기는 수치심 혹은 두려움이 실은 어린 시절부터 성적으로, 학벌로, 경제력으로 줄을 세워온 폭력적인 사회적 시선, 타인의 시선에 몸을 맡겨온 피상적인 삶에서 온 것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틱낫한 스님의 말을 빌리면 “부정적인 집단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우리가 허용”한 것이다. 마음의 힘이 생겨야 부정적인 마음이 우리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알아채고 내보낼 수 있다.

명상은 마음공부다. 마음은 무엇보다도 1인칭에서 시작한다. 실제로 1인칭이 있어야 2인칭, 3인칭도 의미를 가지는 법이다.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나’를 힘들게 하거나 화나게 하는 타인에 대해 습관적으로 원망하거나 질타하기만 하는 일은 마음공부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핵심은 왜 내가 그런 사람과 그런 인연에서 그런 감정들을 되풀이하며 고통스럽게 그런 인연에 끌려 다니는 지 알아채는 일이다.

명상의 명(冥)자는 어두울 명자(冥字)다. 어두워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명상을 할 때 눈을 감는 사람들이 많다. 보이는 것에 유혹당해 산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눈을 감고 생명의 원천인 숨을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지면 숨과 함께 무수한 형상들과 마음들이 창조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주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이다. 분별하고 도취하고 밀어내고 끌어당기고 실망하고 기대하게 하는 그것들에 끌려 다니지 않고 그것들을 그저 바라볼 수 있게 되면 고통까지도 평화로 바꿔내는 힘이 내 안에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미얀마의 선승, 우 조티카는 『여름에 내린 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침착하고 당당하게 고통을 맞이한다.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까? 고통을 통해 놓아버림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도는 이것이다. “내가 고통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길, 그리고 그것을 고요하게 바라볼 수 있기를.”

핵심은 ‘고요하게 바라보기’인 셈이다. 연말연시, 분주하고 소란하다. 마음 정원을 돌볼 수 있는 고독의 시간이 더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내 마음 정원에 들어와 자라고 있는 감정들이 무엇인지 가만히 바라보며 이름을 붙여보자. 우울인지, 불안인지, 분노인지, 원망인지, 질투인지 혹은 설렘인지. 사실 기쁨이나 설렘도 엄청나게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감정들이다. 그 감정들에게 주도권을 주어 내 마음정원을 휘젓고 다니지 하게 말고 그들이 그저 놀고 돌아갈 수 있도록 가만히 두고 보자, 렛잇비! 평화는 거기서 온다.

이주향 수원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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