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비틀거리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누적되어온 경제적 추세가 결국은 정치적 토양을 변화시켜 버린 것이다. 개방화, 자유화, 정보화 혁명의 가속으로 자본과 상품, 공장, 정보의 이동에 국경이 없어지고, 중국의 저가상품 공세는 미국과 유럽의 제조업 고용을 빠르게 줄이기 시작했다. 22~55세 미국 남성들의 노동참여율은 1985년 94%에서 2020년 88%로 떨어졌고, 영국에서는 민간고용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70년 45%에서 2020년 17%로 떨어졌다. 독일,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국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주로 저학력 백인 중산층 근로자, 남성 가장들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 흔들려
경제적 요인이 민주주의 토양 부식
미국의 변화, 민주주의 시련기 예고
어떤 결과든 헌재 판결 존중해야
소득 불평등은 크게 늘었다. 국민소득에서 상위 10%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의 경우 1981년 35%에서 2020년 48%로 증가했다. 같은 해 상위 10%가 소유한 순자산의 비중은 70%였다. 영국의 최고경영자 평균연봉은 1998년 직원 평균연봉의 48배에서 2016년에는 129배로 증가했고, 미국에서는 이 비율이 1980년 42배에서 2016년 347배로 증가했다. 고소득자의 소득만 증가했고, 국민 대다수의 소득은 정체 내지 감소했다. 제조업 근로자, 중산층들은 자신들이 점점 더 낮은 소득계층으로 전락해갈 수 있다는 불안에 싸였다. 이러한 ‘지위 불안’은 포퓰리즘과 선동의 비옥한 토양이 된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계층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보다 몇 단계 위에서 더 아래 계층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지닌 중하계층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더 적극적이 되며, 극좌 또는 극우의 지지층이 된다. 로마 공화정의 붕괴를 가져온 것도 자영농 계층의 공동화와 점령지에서 막대한 부를 얻은 장군 및 자본가 계층의 출현이었다.
민주주의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계몽주의 운동, 산업혁명과 더불어 지난 약 2세기에 걸쳐 서구에서 각고와 희생, 피의 혁명을 거치며 점진적으로 자리를 잡아온 제도다. 재산, 인종, 성별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는 오늘날의 보편적 참정권, 대의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존재한 기간은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극히 짧은 최근의 일이다. 영국에서 1928년 보편적 선거권이 부여되었고, 프랑스·이탈리아는 1945년이었다. 미국의 모든 주에서 흑인의 참정권에 차별이 없어진 것은 1965년이었고, 스위스는 1990년에야 완전한 보편적 선거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우리는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서구에서 2세기가 넘는 긴 갈등과 투쟁으로 쟁취된 보편적 선거제도,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하루아침에 선물처럼 받아 들었다. 독재체제로 회귀하기도 했고, 형식적 민주주의에 그친 면도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를 포기했으면 선진국 문턱을 넘어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노력보다 서둘러 파괴하는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 규칙은 다수결의 수용과 법치이다. 정치인과 국민 중에 지금 최고 사법기관의 결정마저 부정하려고 드는 모습은 매우 우려스럽다. 주먹세상을 바라는 것인가?
2차대전 후 민주주의가 번성하게 된 데에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할이 컸다. 미국은 유럽에 앞서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승전 후 패전국에 배상금 요구 대신 원조를 주며 빠른 부흥을 이루게 한 역사상 드문 나라다. 그런 도덕적 권위로 전후 세계질서를 주도하며 민주주의를 세계에 확산시켜 왔다. 그러나 민주주의 심장부인 미국에서부터 오늘날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포퓰리즘, 금권정치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부식시키고 있다. 근대민주주의 발상지인 영국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큰 시련에 직면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경제적 변화의 누적은 바로 지난 30년간 우리 경제에서 진행되어 온 일이기도 하다. 제조업 고용은 줄고 소득 불평등은 심화하여 왔으며, 경제성장률은 이대로 가면 곧 0%대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인 누군가의 소득증가는 누군가의 소득감소로만 가능하게 된다. 갈등과 분열의 토양은 심화할 것이다. 중국의 산업기술 추격은 지금 우리 제조업 기반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철강, 석유화학, 기계, 조선 등 우리나라 남쪽 산업단지 벨트들이 곧 미국의 ‘러스트벨트’처럼 될 위험에 처해 있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면 우리는 자의적인 독재, 부패와 협박, 내부자들 간의 특혜, 언론에 대한 재갈과 국가가 조작한 허위 속에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세상은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라는 이 시대의 깨어지기 쉬운 그릇을 손에서 놓치면 안 된다. 권력구조를 재정립하고, 정치문화를 바꾸며 경제정책의 기본 틀과 국정운영시스템을 혁신해 국가의 신뢰를 회복하고 새로운 사회 기풍을 불어넣는 것이 지금 정치와 지도층이 해야 할 일이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조윤제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