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하고 그동안의 삶을 정리하고파 옛날 일기를 들춰보다가 약간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 일기장 갈피 사이에서 툭 떨어졌다. 무심코 들고 보니 차이나 의사 가운을 입은 삼십 대 인물과 스포츠머리에 어깨가 다부진 이십 대 청년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약간은 긴장되고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좀 오래된 기억이긴 하지만, 육군치과군의관으로 오랫동안 주로 국군통합병원의 군의관으로 복무하다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그해 4월초에 서울 중구 퇴계로2가 남산동 입구, 덜그럭거리는 낡은 나무 계단이 있는 일본식 목조건물 2층에 치과의원을 개업했다.
개업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관계로 토ㆍ일요일에도 병원 문을 열고 진료를 했던 터였다. 오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조금 지났을까. 웬 수수한 초록색 티셔츠를 입은 약간 촌티나지만 순박해 보이는 청년이 오른손으로 오른쪽 턱을 감싸고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처음엔 못 알아보았으나 간호사가 차트를 기록하고 치료 의자에 그를 인도해 앉았을 때 비로소 그가 그 유명한 축구 스타 차범근 선수라는 것을 알았다. 첫인상은 얌전하고 마음씨 착한 평범한 시골 청년 같았다. 스포츠머리에 어깨가 떡 벌어진 다부진 체격이었다. “차범근 선수시죠? “예, 선생님 제가 이가 아파서 왔습니다. 잘 좀 치료해 주십시오.” “예, 어느 치아가 아프시죠?” “이 치아입니다.” 하면서 가리키는 치아는 다름 아닌 사랑니였다.
당시 치과의원에 엑스레이 시설이 없는 치과의원이 많았다. 그래서 병원 간판에 ‘X-ray 부설’이라고 써서 선전하기도 했었다. 마침 우리 병원에도 엑스레이가 설치되어 있어 X-ray 사진을 촬영하고 검진을 해보았더니, 하악 우측 제3대구치(사랑니)가 그 앞에 있는 제2대구치에 걸려 더 이상 나오지 못 하고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으며 치아와 치아 사이에 음식물이 자주 끼어 충치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만성 우식증(충치)에 급성 치수염으로 통증이 심했다.
그 치아 상태로 보아서는 발치를 하는 것이 좋으나, 대통령배(박스 컵) 국제축구대회 중이고 내일 시합이 있다고 하니 통증을 제거하는 응급처치만 해주겠노라 하면서 국소마취를 했다. 하악 전달마취에 침윤마취까지 했는데도 통증은 계속되어 차 선수는 괴로워했다.
리도카인 마취 앰풀을 서너 개를 했는데도, 그래서 입과 입술이 삐뚤어 돌아가도록 다른 치아나 부위들은 마취가 되었는데도 그 치아만은 되지 않았다. 국군통합병원에서 8년간의 충분한 임상경험이 있던 터에 자신이 있긴 했었는데, 염증이 한창 진행되는 치아 주변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치아 내 압력이 높아짐에 따라 마취액을 밀어내어 깊숙이 침투되지 못하는 경우는 간혹 있다곤 하지만 이렇게 마취가 안 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결국은 더 이상 마취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우선 치수강을 오픈시켜 압력을 떨어뜨리고 통증을 줄이려 시술을 하는 순간 그렇게 잘 참고 있던 차 선수가 사지를 쭉 늘어뜨리고 기절을 해버렸다. 나는 크게 당황했다.
이런 경우, 극심한 통증으로 인한 쇼크이거나 리도카인 마취제 쇼크인데 이 경우는 둘 다인 것 같았다. 얼른 치료 의자를 완전히 수평으로 눕혀 머리를 낮추고 허리띠를 풀고 간호사와 나는 어깨와 손발을 주무르고 나름대로 응급처치를 했다. 119를 부를까? 망설이기도 했다. 잘못되면 어떡하지? 이제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유명한 축구선수 차범근을 치료하다 사고를 냈다고 언론에 대서특필 되는 등, ‘내 치과의사 생활이 제대로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하고 여기서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과 상상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주무르고 있는 어깨는 단단하다 못해 무쇠 같았고 허벅지와 다리의 바위 같은 근육은 실로 놀라웠다. 차 선수에게 계속 정신 차리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다리기를 한 20분 가량 지났을 때(왜 그렇게 긴 시간이었는지) 차 선수가 눈을 뜨며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괜찮은가 하고 물었더니 “괜찮습니다. 통증도 조금 나아진 것 같은데요, 미안합니다.” 내가 더 미안한데 자기가 미안하다고 먼저 했다. 여하튼 그렇게 말하면서 정신을 차린 차 선수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머리를 좀 들고 치료 의자를 약간 세운 다음 치수강 내에 감염된 치수를 제거하고 세척 소독하고 진정제를 넣고 임시 충전을 했다. 물론 약도 처방했다. 그리고 시합이 끝난 후에 시간을 내서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사랑니를 발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상세히 일러 주었다.
그러는 와중에 언제 와 있었는지 키가 큰 김재한 선수와 허정무 선수 등 사 오명이 대기실에 앉아 있다가 “원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차 선수가 누워 있습니까?” 치과 치료 받으러 간다던 차 선수가 오래 돌아오지 않으니까, 치과 길 건너 세종호텔에 합숙하고 있던 국가대표 선수들 중 몇 명이 치과에 우르르 와 본 것이다. 그리고 “뭐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따지듯 큰 소리로 항의를 했다. 겁이 덜컹 났지만 그간의 자초지종과 경과를 이야기해 주고 모든 것이 괜찮아졌으니 안심하고 차 선수를 데리고 가서, 내일 경기를 위해 오후에 있을 예정이라는 연습과 훈련은 시키지 말고 안정하고 푹 쉬도록 당부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일러 보냈다. 한참을 멍하니 간호사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긴장이 풀리니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땀이 나고, 온몸이 지쳐 한숨이 나왔다. ‘오늘 저녁에 통증도 없고 괜찮아야 할 텐데’ 걱정에 걱정이었다.
그 다음날 난 대통령배(박스 컵) 축구 경기 TV 중계방송을 보면서 제발 차범근 선수가 아무 일 없이 출전해 주기만을 바라고 기다렸다. 축구 경기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선수들 중에 차 선수를 찾았고 드디어 건장한 차 선수의 모습을 보고 반가웠고 안심이 되었다. 경기를 잘해야 할 텐데 걱정을 많이 했다. 차 선수는 그 뛰어난 기량으로 열심히 뛰었다.
어느 나라와 싸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당시 1:1 동점 상황으로 끝날 무렵 드디어 차범근 선수의 강력한 슛이 터져 1:2 한국이 극적으로 승리했다. 나는 벌쩍벌쩍 뛰면서 좋아했다. 무사히 건강한 모습으로 출전만이라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이렇게 잘 싸워 준 것이 그지없이 반갑고 고마웠다. 그리고 그가 그지없이 자랑스러웠다. 전에도 차 선수를 좋아 했지만 이제 나는 그의 완전 팬이 되고 말았다.
차 선수는 이제 시합도 끝나고 치아 통증도 없고 하니 사랑니 발치는 안 하려고 할 것이고, 만일 하려고 마음먹는다 해도 그 난리법석을 쳤으니 우리 병원에는 안 오겠지! 하고 그 사건은 잊어버렸다. 한 달쯤 지났을까 차 선수가 또 찾아왔다. “지난번에 저 때문에 선생님, 고생 많이 하셨죠? 이제 사랑니 빼러 왔으니 빼주십시오.” 했다. 순간 당황했다. 8년 동안 수많은 장병들을 치료하고 수많은 치아들을, 특히 사랑니 발치를 많이 했으므로 임상경험은 충분했지만 혹시나 전번 같은 경우가 생길까 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랑니 발치는 굉장히 어려운 수술이고 또 전번과 같이 국소마취가 잘 안 되고 고생하면 안 되니까 응급처치 시설이 잘 되어 있는 다른 큰 종합병원 치과에 가는 것이 서로 좋을 텐데요. 내가 치과대학병원에 소개장을 써 줄테니 그렇게 합시다.”고 정중히 권했다. 그런데 조금의 망설임 없이 “선생님이 치료했던 치아이니 선생님이 빼주십시오. 전 선생님 믿습니다.” 지난 사건에도 불구하고 날 믿는다니 고맙고 감사했으나 큰 치과병원에 가기를 두어 번 더 권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난 수술동의서까지 받아 놓을까 하다가 수술하기로 결심을 했다. 전번에 그렇게 안 되었던 마취가 리도카인 앰플 2개로 잘 되었다. 잇몸을 절개하고 치아를 3등분으로 분리하여 발거하고, 식염수로 발치와를 세척하고, 봉합도 꼼꼼하게 정성들여 해서 잘 끝낼 수 있었다. 약을 처방하고 집에 가서 얼음찜질을 하라고 일러 주었다. 다음 날 드레싱 하기 위해 내원하라고 했는데 오지 않았고, 삼일 째 되는 날 들렸다가 발치 일주일 후에 봉합사(縫合絲)를 제거하고 사랑니 사건은 일단 끝이 났다.
그후 차 선수는 우리 병원의 단골 환자가 되어 1979년 서독 ‘분데스리가’ 로 갈 때까지 치과 치료를 받았으며 치과 상담을 위해 자주 들렸다.
하루는 여자 친구라며 지금의 부인 되시는 오은미 씨와 같이 치과에 와서 같이 치료받기도 했다. 그때 차범근 선수는 고려대에, 오은미 씨는 연세대에 재학 중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오은미 씨는 귀엽고 예쁜 얼굴에 첫인상이 참해 보였다. 특히 까만 눈동자가 빛나며 영리해 보였다. 병원 대기실 의자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 사람의 치과 치료나 상담은 물론 때로는 연애 상담, 인생 상담 등을 나누며 친하게 지냈었다.
한번은 우리 치과 바로 앞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차범근 선수와 주치의로 기념사진을 찍자고 해서 찍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인화하지 않고 핸드폰 갤러리에 저장하는 데이터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려 서운했는데, 인화된 옛날 사진을 들고 보니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정겹기 그지없다.
축구계의 거성으로 한국은 물론 세계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던 차 선수의 모습을 지금까지 자랑스럽게 지켜보면서, 나 또한 늘 치과의사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왔던 것 같다.
한때 차범근 선수 부부의 치과 주치의로서의 인연과 추억만이 한 장의 빛바랜 사진과 함께 내 가슴에 오롯이 남아 있다.

김계종 전 치협 부의장
-월간 《문학바탕》 시 등단
-계간 《에세이포레》 수필 등단
-군포문인협회 회원
-치의학박사
-서울지부 대의원총회 의장
-치협 대의원총회 부의장
-대한구강보건학회 회장, 연세치대 외래교수
-저서 시집 《혼자먹는 식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