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주유천하(周遊天下)와 서하객(徐霞客)

2024-09-30

오랜 세월 중국인은 동악 태산(泰山), 서악 화산(華山), 남악 형산(衡山), 북악 항산(恒山), 그리고 중악 숭산(嵩山)을 ‘5악(五嶽, the five sacred mountains)’으로 칭하며 신성한 장소로 여겼다. 과거 천하의 묵객들이 이 ‘5악’을 방문하여 시나 문장을 남겼다. 지금도 세계적인 관광 명소 가운데 하나다.

특히 태산의 정상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封禪) 의식을 행한 후 더 유명해졌다. ‘태산은 머리, 화산은 발, 숭산은 가슴과 배, 항산은 오른손, 형산은 왼손을 상징한다.’ 이렇게 ‘5악’을 동서로 누운 자세의 인체로 단순화한 반고(盤古) 설화도 존재한다.

이번 사자성어는 주유천하(周遊天下. 두루 주, 여행할 유, 하늘 천, 아래 하)다. 앞의 두 글자 ‘주유’는 ‘두루 돌아다니다’라는 뜻이다. 뒤의 두 글자 ‘천하’는 여기에서 ‘지상의 모든 지역’이란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여러 지역을 두루 여행하다’라는 의미가 만들어진다.

가슴에 품은 포부는 달랐지만, 공자 이후에도 자비(自費)를 들여가며 중국 각지를 여행한 유명한 인물이 여럿 있었다. 명나라 말기의 저명한 여행가 겸 지리학자 서하객(徐霞客, 1587-1641)도 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서하객은 장쑤(江蘇)성 강음(江陰)의 한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7세에 불행한 사고로 부친을 여의었다. 하객은 그의 호(號)이고, 본명은 굉조(宏祖)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다방면의 글을 읽었으나, 과거나 관료 생활에는 관심이 많지 않았다. 21세에 첫 여행을 시작했다. 이후 약 30년에 걸쳐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위주로 하여 북쪽으로는 산둥(山東), 남쪽으로는 구이저우(貴州)와 윈난(雲南) 등 무려 16개 성(省)을 주로 도보로 여행하고 답사했다. 여행 과정에서 족병(足病)이 생겼고 기온이 높은 윈난 지역에서 더욱 악화됐다. 54세를 일기로 일찍 세상을 떴다.

‘지팡이를 짚으며 급히 길잡이를 따라 걸어갔다. 초반에는 바위에 의지하여 넘거나 무성한 나무들의 가지를 일일이 손으로 젖히면서 내려갔다. 이어 두 바위 사이의 골짜기 물길을 따라 매우 가파른 코스로 하산했다.’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의 숭산 여행 부분에 이런 위태로운 하산 관련 기록이 나온다.

‘서하객유기’는 이처럼 여행하며 매일 현장에서 기록한 그의 일기를 사후에 여러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유실되지 않고 보존된 원고만 해도 약 60만 자에 달한다. 중국의 지형, 수리, 기후, 지질, 식물 등에 대한 그의 뛰어난 답사 연구 성과가 빼곡히 담겨 있어 학계의 귀한 자료다.

지도 제작에 종사하던 콜럼버스가 탐험가로 변신해 신항로를 개척하고 신대륙 근처 바하마 제도에 상륙한 해는 1492년이었다. 나가사키로 향하던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 표류하다가 우리 제주도에 나타난 해도 1653년이다.

그 무렵 중국은 농업 기술의 발전과 꾸준한 개간으로 경제 생활이 개선되고, 과거와는 다른 유형의 지식인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통 의학과 약학 분야에서는 ‘본초강목(本草綱目)’의 이시진(李時珍), 기술과 공학 분야에서는 ‘천공개물(天工開物)’의 송응성(宋應星) 등 걸출한 인물들이 실용적인 연구 성과들을 세상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동료 지식인들이 천시하거나 별 관심을 두지 않던 분야였다. ‘서하객유기’라는 놀라운 저서도 이런 새로운 흐름 가운데 탄생했다.

동일한 명승지를 답사하고 쓴 글이더라도 시(詩)와 산문(散文)은 장르가 다르다. 특히 여행이나 답사 관련 산문의 묘미는 매 순간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생생한 현장감 전달에 있다. 사진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서하객은 색채, 형태 등 하나하나를 기억에서 호출하며 집필해야 했다.

‘서하객유기’는 대하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 두껍다. 낮에는 부지런히 두 발로 답사하고 밤에는 또 눈을 비벼가며 호롱불 아래서 집필했을 그의 성실한 태도가 글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바야흐로 ‘스마트폰 속 주유천하’ 시대다. 새소리와 바람 소리 등 일부 재현이 가능한 것도 있지만 그 감흥(感興)은 천양지차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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