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잔] 흑토 사람들

2025-12-05

영하 20도를 훨씬 밑도는 혹한기. 누구라도 아랫목을 벗어나기 힘든 한파에 이 가족은 강가에서 꼬마보다 몸집이 큰 고기를 잡았다. 이들에게 강이 녹기 시작하는 계절은 전통적으로 중요한 어업의 시기다. 철갑상어 같은 큰 물고기들이 얕은 층을 따라 이동하기 때문이다. 흑룡강 주변에서 사는 이들은 소수민족인 허저족(赫哲族, Hezhe) 일원이다.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에서도 5000명 남짓한 희귀 소수민족이다. 분명 사람을 기록했지만 그들을 둘러싼 자연과 노동, 그리고 전통의 결까지 함께 포착한 중국의 사진가, 그가 바로 왕푸춘이다.

중국엔 흑토(黑土)라 불리는 검은 땅이 있다. 세계적으로 비옥한 토양 지대, 동북 3성(헤이룽장·지린·랴오닝)이다. 사진가 왕푸춘 역시 북방의 검은 땅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하지만 그곳을 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철도국 소속 노동자로 두 명의 자녀를 양육하기도 벅차 배급품을 팔아가며 사는 삶. 하지만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했고 40대 중반에 만학도가 된다. 일상 속에서 대상을 찾아야 했던 그는 넓은 대륙을 오가느라 열차 안에서 며칠씩 보내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렇게 작업한 ‘Chinese on the Train’ 시리즈가 프랑스 르몽드에 발표되며 해외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퇴직 후 그는 간절히 원하던 흑토를 기록하는 사진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흑토의 소수민족들은 전통적 수렵과 생활 방식, 샤머니즘과 토템 신앙에 뿌리를 둔 민족의 풍속을 여전히 간직했다. 그는 오로첸족·다우르족·에벤키족·허저족 등 강과 숲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겨울에 집중했다. 그래서 촬영은 늘 영하 20도 이하의 혹한기에 진행했고 카메라는 CamboLegend 8×10 대형카메라를 선택했다. 사실 고령의 몸으로 한파와 폭설 가운데 대형카메라 작업을 한다는 건, 그 고됨을 넘어설 만큼의 애정이 없다면 쉽지 않은 길이다. 그래서 그런지 왕푸춘의 사진은 화려한 이야기를 덧대지 않는다. 그저 사람과 계절이 만들어 낸 삶의 표정을 담백하게 보여줄 뿐이지만 묵직한 울림이 있다. 소수민족들의 삶을 그대로 받아 적은 듯한 사진 속 세상엔 혹독한 자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흑토 사람들의 단단함이 가득하다.

석재현 사진기획자·아트스페이스 루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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