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조원. 정부가 내년 예산안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줄이겠다고 한 지출 구조조정 규모다. 지금까지 정부가 줄이겠다고 한 지출 구조조정 규모로는 역대 최대다. 지출 구조조정은 정부가 비효율적이거나 우선순위가 낮은 사업의 예산을 줄여 재정 여력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매년 씀씀이는 늘어나는 데 비해 세수 기반은 취약한 상황에서 재정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 때문에 역대 정부는 지출 구조조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재정건전성을 전면에 내세운 윤석열 정부에서 강도 높은 지출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기획재정부는 2022년 당시 각 부처에 ‘2023년도 예산안 편성 및 기금 운용계획안 작성을 위한 추가 지침’을 보냈다. 이 지침에는 “모든 재량지출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최소 10%를 의무적으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동안 ‘10% 수준’에서 구조조정을 진행했던 역대 정부와 달리 ‘최소 10%’로 수위를 한층 높인 셈이다. 이 같은 노력 덕분인지 윤석열 정부에서 지출 구조조정 규모는 3년 연속 20조원을 넘어섰다.
반복된 ‘깜깜이 구조조정’ 의구심
지출 구조조정은 어떻게 진행될까. 정부는 유사·중복 사업을 통폐합하거나 투자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방법을 통해 지출 구조조정을 한다. 그러나 정부는 구체적으로 어느 사업에서 얼마나 예산을 줄였는지는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 정부가 지출 구조조정 규모를 성과로 내세우면서도 검증을 사실상 회피하는 셈이다.
지출 구조조정의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해달라는 기자단의 요구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예산실의 줄다리기는 매년 예산안 브리핑에서 벌어졌다. 지난해 국정 감사에서 당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기재부에 10여 차례에 걸쳐 지출 구조조정 내역을 요구했지만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깜깜이 구조조정’은 지난 8월 13일 대통령실이 주재한 ‘나라재정 절약 간담회’에서도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유병서 기재부 예산실장은 “구조조정 대상 1만7000개 사업 중 4400개 사업 예산을 감액했다”며 “폐지 사업도 올해 200여개에서 내년에는 1300개가량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날 간담회에 참석했던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장은 “폐지된 1300여개 사업이 9350개 세부 사업의 일부인지, 종료 사업은 얼마나 포함이 됐는지 구체적인 내역을 보고하는 과정을 거치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의구심은 그동안 지출 구조조정이 꼼수로 진행된 사례에서 비롯된 영향이 크다. 대표적으로 예산 집행 시점을 미루는 경우다. 정부는 2025년 제2차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에 필요한 재원 총 30조5000억원 중 지출 구조조정을 통해 5조2772억원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5224억원의 예산이 줄어든 가덕도 신공항 예산은 공기 연장을 두고 국토교통부와 시공사 간의 이견으로 일정이 지연됐다. 지출 구조조정보다 예상치 못한 이유로 예산 집행 시점만 미뤄진 것이다.
당시 1조9273억원이 감액된 지방교육재정교부금도 지출 구조조정의 취지와는 거리가 멀다. 정부가 기존 전망치보다 10조3000억원 세수가 줄어드는 것으로 반영하면서 자동으로 줄어들었다. 교육교부금은 내국세의 20.79%가 일률적으로 배정된다.
지출 구조조정이 효과적으로 이뤄지려면 국가재정전략회의가 내실 있게 운영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어느 곳에서 돈을 줄일지는 결국 어느 곳에서 돈을 주로 쓸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실제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확정된 분야별 재정투자 방향을 바탕으로 우선순위가 낮은 분야를 중심으로 지출 구조조정이 진행된다.

국가재정운용계획 토론회, 참여형 토론회로
노무현 정부 때 도입된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위원과 전문가들이 모여 정부가 국민의 세금과 국가 예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큰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단순히 정부가 작성한 계획을 승인하는 형식에서 벗어나 정책 우선순위와 자원 배분을 놓고 치열하게 의견을 교환하며 국정 과제에 필요한 예산 구조 변화를 끌어내는 전략적 기구 역할이었다. 2004년 당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복지 예산 증액에 반대하는 재정경제부 측에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제안하는 등 치열하게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국가재정전략회의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모두 국가채무 관리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 성장 동력 발굴을 위한 재정의 역할에 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기재부가 예산 총량과 세부 사업을 사실상 결정한 후 회의가 열리면서 국가재정전략회의는 명목상 거수기 역할에 머문 경우가 많았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나눠먹기식 연구개발(R&D) 예산은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면서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가 다음 해에는 R&D 예비타당성 조사를 폐지하는 등 일관되지 않은 정책을 펼치며 혼선을 빚었다.
재정 운용의 투명성을 강조한 이재명 정부는 국가재정전략회의를 국가재원배분회의로 전환해 재정투자 방향을 결정하겠다고 예고했다. 특히 국가재정전략회의의 핵심 요소인 톱다운(Top-Down) 예산제도를 강조한 점이 특징이다.
톱다운 예산제도는 국가 예산을 편성하는 방법의 하나로 정부가 먼저 전체 예산의 규모와 각 부처가 쓸 수 있는 한도를 정한다. 이후 각 부처는 이 한도 안에서 자유롭게 예산을 계획하는 방식이다. 어느 분야에 얼마를 쓸지 정부가 정책적으로 결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부처가 예산을 편성하기 때문에 부처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것이 특징이다. 국가재정전략회의를 통해 재정 목표와 우선순위가 예산에 반영되는 셈이다.
이는 하위 기관이나 부서에서부터 예산 요구를 시작해 상위로 올라가는 보텀업(Bottom-up) 예산 편성제도와 구별된다. 현재는 각 부처 등이 자신들이 업무 수행에 필요한 사업별 예산을 요구하면 이를 토대로 기획재정부가 취합해 예산안을 편성한다. 이 과정에서 기재부는 예산 총액 설정, 세부사업 편성, 성과평가까지 예산 전 과정을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톱다운 예산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가재정운용계획 토론회를 ‘시민 숙의단’ 형식의 실질적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참여형 토론회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총액 설정은 국가재정운용회의 등 국민적 합의를 통해 이뤄지고, 세부사업 편성 및 집행은 실무부처가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전문성을 통해 집행하며, 예산부처는 성과평가와 예산 모든 과정을 관리하는 방식이 돼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