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고 있다는 마음

2025-11-04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이 조용히 파문을 만들고 있다. 보고 감동한 이들이 대관해 상영회를 열 만큼 가슴을 흔드는 힘이 있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진료실에서 만나는 친구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덤이었다.

주인공 주인이는 부산스럽고 쾌활한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친구와 잘 어울리고, 공부보다 태권도를 좋아하고, 진로 상담을 할 때 선생님과 농담을 하는 사회성 좋은 아이다. 그런데 아동 성폭행범이 출소 후 동네로 오는 걸 반대하는 서명을 받으려는 친구와 다투면서 숨겨온 사실이 드러난다. 그에게도 트라우마를 남긴 오래전 사건이 있었다. 주인이뿐 아니라 가족의 행동도 모두 그 사건과 관련이 있다.

주인이가 쾌활하고 밝지만 진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몸을 쓰는 운동에 몰두하는 것, 엄마가 조용히 술을 마시고 약을 먹어야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 아빠가 멀리 시골에서 자연인으로 사는 것, 동생이 마술을 익히는 데 몰두하는 것도 모두 그 사건을 다루는 각자의 방식이었다.

외상적 사건 이후 마냥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모두 각자 할 수 있는 한 애를 써서 극복하려 노력한다. 애쓰다의 ‘애’는 ‘몹시 수고로움’을 뜻한다. 마음의 에너지가 든다는 의미다. 그걸 성공했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 평가하기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아슬아슬한 평형 상태로 지낼 수 있다. 덕분에 평온한 일상은 주어지지만 애쓰느라 든 에너지의 비용은 청구서로 날아오고, 메우지 못해 빈 곳이 있거나 몸에 균열이 생기고, 감정의 한 부분이 쉽게 폭발하기도 한다. 그 정도가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트라우마에 대한 두 가지 흔한 오해가 있다. 하나는 외상을 경험하면 모두 평생 잊지 못할 기억 속에 사로잡혀 외상후스트레스장애 환자가 되리라는 것이다. 여러 연구를 보면 일반적으로 같은 사건을 경험한 이후 5~10% 정도만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9·11 테러 이후 뉴욕시민 7.5%가 초기에 증상이 있었지만 반년이 지나자 0.6% 정도만 남았다. 더 많은 이들이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한다.

두 번째, 피해자는 언제나 피해자답게 지내야 한다 믿는다. 웃고 밝은 표정을 하고, 스스럼없이 지내는 걸 보면 실제로 그 정도 사건은 아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모른다. 수습을 어떻게든 하고 나면 최대한 일상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무척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내지만 하루가 버겁다.

1955년 하와이에서 태어나 매우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을 40년간 추적해보았다. 그중 3분의 1은 매우 건강하게 성장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족, 교사와 같은 인간관계에서 무조건 믿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었다는 것이다. 주인이의 친구, 가족, 자원봉사 모임의 존재가 무척이나 소중하게 보인 이유다.

어른과 달리 10대는 몸뿐 아니라 마음이 성장하는 시기다. 어른과 달리 자체적으로 자라는 힘이 있다. 성장의 힘을 믿어야 한다. 다 자란 나무가 아니라 자라는 나무는 벼락을 맞고 난 다음이라도 알아서 크는 힘으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영화가 내게 울림을 준 이유들이다. 우리는 살면서 불가피하게 너무나 힘든 사건을 만날 수 있지만 성장의 힘을 믿고, 지지해주는 네트워크가 있다면 낙관을 해도 좋지 않을까. 각자의 방식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으로 애를 쓰고 있다면, 토닥이고 응원해주며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하다. 사건은 피할 수 없고 일어나 버렸지만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힘은 ‘애를 쓰는 마음’에서 온다고. 영화를 보고 분노가 아니라 응원의 마음이 드는 것도 이런 이유다. 상영관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두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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