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잠을 자는 일조차 거저 주어진 선물이었다는 걸 알게 된 요즘이다. 딱 세 시간 자면 잠이 깨어 다시 오지 않는다. 낮에는 마치 먼 외국에 다녀온 사람처럼 시차를 느낀다. 그 시차가 의미하는 것은 나이 듦에 의한 멜라토닌의 감소 때문이란다. 좋게 생각하면, 노화란 다른 인류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닐까? 불면의 새벽에 들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한 구절이 짠하게 남았다. “아우슈비츠에서 진짜 좋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말한다. 물 대신 가스가 나오는 가스실의 존재를 늘 의식하고 있었기에 고압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에 부딪쳐 자살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어쩌면 우리 중 대부분도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11월에 떠올리는 연극 명대사
기다림의 힘으로 사는 진실 짚어
삶에 속더라도 포기는 말아야

빅터 프랭클이 남긴 그 유명한 말, “인생을 두 번째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 그건 더 어렵다. “당신이 지금 하려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어머니의 두 번째 인생인 나는 어쩌면 어머니가 살고 싶었던 삶을 살아가는 중인지 모른다. 쉰아홉 살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한동안 텔레비전의 추리극만 골라보았다. 범인을 잡는 숨 막히는 추격전을 졸업하고 칠십 무렵부터는 멜로드라마를 즐겨보셨다. 그렇게 속을 썩고도 어머니는 여전히 미남을 좋아하신다. 그런 어머니가 요즘 즐겨보는 건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다큐 프로그램이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간 사람이 산에서 나는 재료로 음식을 해서 맛있게 먹는 장면, 그 무엇이 어머니를 혹하게 하는 걸까?
잘생긴 아버지가 다른 여인에 빠져 옆에 있어도 옆에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잠을 자지 못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우울하거나 신경질적인 모습도 본 적이 없다. 그 위대한 유전자 덕에 총명한 96세의 노인이 된 것 같다.
아버지는 늘 잠을 못 주무셨다. 내가 그 안 좋은 유전자를 빼닮았다. 성공이란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우울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는 거라는 걸 이제야 안다. 나는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을 싫어한다. 좀 부러워하면 어떤가? 우리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은 무거운 짐을 가득 지고 걸어가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 우리는 이 삶을 견디게 하는 자신만의 고도를 기다리며 매일매일 살아간다. 십 대에서 사십 대 사이의 자살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자살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여러 번 반복해 나오는 ‘고도를 기다리며’ 속의 대사들이 떠오른다. “고도는 언제 온대?” “오기는 온대?” “기다리면서 뭘 하지?” “우리 목이나 맬까?” 인간의 성실과 허무를 짧은 한 권으로 보여주는 이 걸작에는 기다림 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삶의 무게 외에 빠진 것이 있다. 순간을 통과하는 작은 낙들의 기쁨이다. 오랜 세월을 같이 하며 고도를 기다려온 두 사람의 독백, “우리 헤어지는 게 나았을까?” 너무 세월이 흘러 헤어지는 것조차 의미가 없는 두 사람에게 어쩌면 다정함이란 오래된 지팡이 같은 게 아닐까? 다큐 프로그램을 보다가 15년 전 지진으로 초토화된 아이티의 화가들이 지진으로 죽은 사람들의 해골 위에 그림을 그리는 걸 보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지금도 해골은 가장 구하기 쉬운 오브제처럼 보였다.
널려있는 그 해골들은 아무에게도 거슬리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 위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므로. 문득 나도 해골 위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초밀집 지역에는 아직도 거리 생활을 하는 수 없는 고아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중 아무도 자살하지 않는다.
자살이라는 단어가 내게 주는 기억 중 하나는 같은 동네에 오래 살며 가끔 길에서 마주치던 마광수 선생의 기억이다. 나는 그가 그린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그림들을 좋아했다. 기억 속의 그는 선한 사람이었다. 가끔 도에 넘치는 그의 말들은 그 안에 다른 사람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슬슬 추워지는 11월이다. 나는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계속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대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국민교육헌장처럼, 아무리 힘들어도 죽지 않고 살아내야 한다 생각한다.
다음 세대에게 그 기다림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매지 않고 백 살이 된 어르신들의 힘, 그건 우리가 이어나가야 할 소중한 유전자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려 애쓰는, 초록이 지쳐 늦게 단풍드는 가을이다.
황주리 화가·동국대 석좌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