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소기업이 해외 시장에 진출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022년 한국 중소기업의 수출 규모는 889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수출 다각화율은 10년 전과 비교해 큰 변화가 없었다. 한국무역협회(KITA)의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 시 가장 큰 장애물은 현지 유통망 확보(56%), 법규 및 행정 절차(34%), 마케팅 및 브랜드 인지도 부족(27%)으로 꼽히며, 이러한 요소들이 한국 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 시도를 어렵게 만드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 난제 속에서 스타트업 슬로크(SlogK)가 AI 기반 크로스보더 이커머스 중개 플랫폼을 통해 한국 소비재 브랜드의 유럽 시장 진출 장벽을 낮추는 혁신적 솔루션을 제시하며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2022년 6월 설립된 슬로크는 해외 시장에서 한국 제품의 성공적인 안착을 목표로 하고 있다. 본사는 대구에 위치하며, 서울 지사와 파리 샹젤리제에 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파리의 Station F에 업무공간을 마련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있다.
B2C 원스톱 솔루션: 유통부터 CS까지 현지화
슬로크는 제품 수출과 함께 브랜드 인지도 향상과 소비자 직접 접점을 확대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기존 B2B 방식은 대기업에 유리한 구조로 중소 브랜드에게는 진입 장벽이 높은 것이 현실이다. 이에 반해 슬로크는 B2C 크로스보더 이커머스 중개를 통해 한국 브랜드가 유럽 시장에서 효과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한국 본사에서는 엄선된 제품을 수집하고 품질 검수를 진행한 뒤, 프랑스 자회사가 직접 유통, 마케팅, 결제, 고객 서비스까지 총괄한다. 프랑스 현지에서 3일 이내 빠른 배송 서비스를 제공하며, 유럽 소비자들이 신뢰할 수 있도록 현지화된 CS(고객 서비스)를 운영하는 것이 차별점이다. 특히, 소비자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유럽 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마케팅 전략도 병행한다. SNS와 현지 인플루언서를 활용한 디지털 마케팅뿐만 아니라, 팝업스토어와 오프라인 쇼룸 운영을 통해 소비자들이 직접 제품을 체험할 기회를 마련한다.

슬로크 라호진 대표는 기존 B2B 방식의 수출이 대기업 중심 구조라는 점을 지적했다. 중소 브랜드는 현지 네트워크 확보와 브랜딩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설명이다.
그는 “단순 유통이 아닌 현지 소비자와의 신뢰 구축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AI 기반 큐레이션과 로컬라이제이션으로 한국 패션 브랜드의 유럽 시장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고객 취향을 분석해 최적의 제품을 추천하는 AI 기술이 유럽 진출의 핵심 요소”라고 덧붙였다. 이 기술이 판매 차원을 넘어 브랜드와 현지 소비자 간 지속적 관계 구축을 가능하게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AI 기반 맞춤형 큐레이션으로 주도하는 마켓플레이스
슬로크는 AI 기반 맞춤형 큐레이션으로 MBTI 성격 유형을 차용한 16개 스타일 분류 시스템을 개발했다. 유럽 소비자의 구매 데이터(연령, 구매 기록, 클릭 스트림, SNS 관심사 등)를 수집해 ▲미니멀리스트 ▲빈티지 매니아 ▲오피스 룩 애호가 ▲스포티브 캐주얼 등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카테고리로 구분한다. 이 데이터를 AI 알고리즘에 투입해 맞춤형 상품을 추천하는 방식이다. 또한, 알고리즘은 소비자가 상품 페이지에 머무는 시간, 장바구니 담기 빈도 등을 실시간 분석해 최적의 타깃을 선정한다.
“AI가 매장 점원 역할을 한다”…유럽 현지화 전략의 핵심
슬로크의 AI 시스템은 적합한 데이터를 추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 문화 코드를 반영한 맞춤형 마케팅까지 지원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 소비자에게는 자연 친화적인 린넨 소재 의류를, 파리 도심 거주자에게는 미니멀한 디자인의 다기능 아이템을 우선 노출시킨다. 이는 지역별 기후, 문화, 트렌드 차이를 AI가 학습한 결과다.

중소기업 맞춤형 AI 리포트로 유럽 진출 전략 제시
슬로크는 해당 시스템을 B2B 솔루션으로도 확장했다. 중소기업이 제품 정보(이미지, 소재, 가격)를 업로드하면, AI가 유럽 시장 내 경쟁 제품 데이터와 비교해 ▲적정 가격대 ▲타깃 지역 ▲마케팅 키워드를 분석 리포트로 제공한다. 예를 들어 한국 신생 브랜드의 린넨 셔츠를 입력하면, AI는 “프랑스 남부 지역 25~34세 여성 타깃, ‘지속 가능한 패션’ 키워드 강조 권장” 같은 전략을 3초 내로 제시한다. 이는 중소기업이 현지 시장을 심층 분석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 양방향 데이터 수집-제공 시스템은 소비자에게는 맞춤형 큐레이션을 제공하고, 입점 브랜드사에는 유럽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맞춤형 시장 진출 전략을 지원한다. AI 알고리즘은 소비자의 실시간 반응을 분석해 중소기업이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도록 하며, 이를 통해 신속한 시장 대응과 브랜드 최적화를 가능하게 한다.
슬로크 라호진 대표는 “AI가 데이터 제공뿐만 아니라 현지 매장 점원처럼 소비자 니즈를 정밀 분석한다”고 설명했다. 이 기술로 중소기업이 상품 수출과 동시에 유럽 소비자와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 중소기업은 B2B 수출로 인해 현지 시장 반응을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이어 “AI 기반 분석을 통해 B2C 시장에서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강조했다.
K-패션의 유럽 진출: 다나야드(DANAYAD)의 성공적 데뷔
슬로크는 한국 패션 브랜드의 유럽 진출을 지원하는 패션 큐레이션 플랫폼 ‘다나야드(DANAYAD)’를 론칭했다. O2O(Offline to Online) 방식으로 운영되는 이 플랫폼은 20~30대 여성을 주타깃으로 한다. ‘단아한 물의 요정’이라는 의미를 담은 브랜드명처럼, 미니멀한 디자인과 기능성을 결합한 K-패션 제품을 유럽 시장에 선보이고 있다.
2024년 3월부터 4월까지 파리 마레 지구에서 첫 팝업스토어를 진행했다. 한국 중소 패션 브랜드 16개를 선보인 자리에서 현지 소비자들은 “미니멀하면서 세련된 디자인”에 호평을 보냈다.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80%의 참가자가 한국 브랜드를 선택하며 품질과 디자인을 인정했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2025년 1월부터 2월까지 두 번째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이번에는 18개 브랜드를 소개하며 다나야드의 인지도를 확장했다.

다나야드 팝업스토어를 방문한 프랑스 유명 인플루언서 이브 뒤몽(Eve Dumont, 27세, 모델)은 “한국 패션의 고급스러움과 독창성에 놀랐다”고 말했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이자벨 아부콥스카(Isabelle Aboukowska, 29세)는 “한국 제품은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지속 가능하고 세련된 이미지가 있다”고 평가했다. 오드 슈넌테(Aude Chenantais, 33세, 저널리스트) 역시 “직접 입어보며 신뢰가 생겼다”며 “프랑스 소비자의 오프라인 선호 특성을 잘 반영한 전략”이라고 덧붙였다.
프랑스 패션 시장은 연간 1,500억 유로(약 220조 원) 규모로, 글로벌 럭셔리 시장의 30%를 차지하는 핵심 시장이다. 특히, 프랑스 패션협회(Fédération de la Haute Couture)의 보고서에 따르면 25~35세 소비자의 62%가 ‘가성비 높은 디자인’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슬로크가 시장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략을 수립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부 지원과 글로벌 확장 전략
슬로크는 한국 정부 및 다양한 기관의 스타트업 지원을 받으며 글로벌 진출 기반을 강화해 왔다. 2022년 중소벤처기업부 K-STARTUP 예비창업패키지 선정을 시작으로, 2023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신시장 진출 지원 자금을 확보했고, 코리아스타트업센터(KSC 파리) 지원프로그램에 선정됐다. 2024년 3월에는 창업 성공 패키지 청년창업사관학교 14기에 최종 선정 및 우수 졸업을 하며 기업 운영 및 기술 개발을 위한 추가 지원을 받았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Station F 입주로 유럽 진출 교두보를 마련했다. HEC Paris(프랑스 최고 경영대학원) 인큐베이터와 협력해 마케팅·회계 컨설팅을 진행 중이며, ISMAC(파리 패션 전문 교육기관)과 MOU를 체결해 현지 인재 채용도 확대하고 있다.

슬로크 라호진 대표는 “해외 진출 초기 단계의 정부 지원이 경쟁력 확보에 핵심적”이었다고 강조했다. K-STARTUP 예비창업패키지와 KSC 파리 프로그램을 통해 글로벌 진출 기반을 구축했다는 설명이다. 특히 KSC 파리 프로그램 지원으로 법인 계좌 개설 기간을 6개월에서 2개월로 단축하는 성과를 냈다.
최근 CNT Tech와 Station K의 투자조합으로부터 추가 투자를 유치했다. 이 자금은 AI 기술 고도화와 물류 네트워크 확충에 활용될 예정이다.
크로스보더 이커머스 중개는 문화 교류의 통로
슬로크의 크로스보더 이커머스 중개는 상품을 거래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한국과 유럽 간 문화 교류의 통로 역할을 한다. AI 기술을 활용해 유럽 소비자 데이터를 분석함으로써 K-브랜드의 현지화 정밀도를 높이고, 제품 수출에서 문화 수출로의 전환을 이루고 있다.
라호진 대표는 “2025년까지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진출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패션뿐만 아니라 푸드테크, 코스메틱, 콘텐츠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종합 문화 플랫폼으로 성장할 계획이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모델은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며 K-브랜드의 글로벌 K-신뢰도라는 청사진을 그린다. 슬로크는 해외 시장에서 상품 판매를 넘어 한국 스타트업의 철학을 전파하는 문화 사업으로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