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집중력’의 시대? : 집중력이 왜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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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집중력’의 시대? : 집중력이 왜 필요한가

Stolen attention : Why do we need to pay attention?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47), 2025.2.19,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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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집중력, 산만함, 스마트폰, 수도자, 편지

1.머리말

2.과녁 없는 집중의 시대 : <집중력 설계자들>

3.뭐가 집중이고 뭐가 딴짓인가?

4.‘집중’해서 ‘낭비’한 이상한 천재 :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2024년 말,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뇌 썩음Brain Rot’을 선정했습니다.(링크) 스마트폰의 쇼츠, 조각난 SNS글 등만 접하다보니 집중력, 인지기능이 저하되고 있다는 것인데요. 이런 문제는 과거 ‘도둑맞은 집중력’ ‘도파민네이션’ 등 베스트셀러를 통해 꾸준히 제기돼왔고요.

어쩌면 ‘집중력 문제’는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베스트셀러 <도둑맞은 집중력>. (왼쪽) 2024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뇌썩음brain rot'. 옥스퍼드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brain rot은 "사소하고 의미없는 정보들의 과섭취(오늘날은 특히 온라인 콘텐츠)의 결과 발생하는, 정신적이고 지적인 악화 현상"을 뜻합니다. / 어크로스, Oxford university press

그런데 문득 생각합니다.

과연 집중력 문제는 ‘21세기형 문제’일까요?1)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도 저는 틈만나면 열심히 딴짓을 하느라 꾸중을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질문은 이어집니다.

우리는 과연 바깥에 대한 관심을 뚝 끊으면 집중력을 얻을 수 있는 걸까요? 그런데 애초에 집중력은 왜 필요한 걸까요? 우리는 ‘집중력 문제’라고 너무 간단하게 말하곤 하는데 집중력 부족은 ‘문제’일까요? 집중해야 할 목적과 해찰은 그렇게 무자르듯 나뉘는 것일까요? 딱히 이루고 싶은 목적이 없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애초에 집중을 못(안)하는 쪽이 ‘자연스러운’ 거 아닐까요? …

이런저런 질문이 벌써 잔뜩입니다만, 요는 우리가 ‘집중력 문제’라는 말을 지루할정도로 되뇔 때 너무나 당연히 간과하곤 하는 지점들을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집중력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고요.

오늘 레터에서는 <집중력 설계자들>(제이미 크라이너),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을 지팡이 삼아 ‘집중력’에 대해 해찰해보겠습니다.

1) 2024년 올해의 단어인 '뇌 썩음Brain rot'은 얼핏 신조어처럼 보이지만, 실은 1854년 헨리 데이빗 소로가 <월든>에서 처음 쓴 것으로 알려진 단어입니다. 당시엔 전보가 처음 발명되면서 최초로 먼곳의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됐는데요. 실시간으로 오가는 간접적인 소식, 뜬소문 등으로 정신이 혼란스러워지는 19세기의 세태를 비판하며 소로는 이 단어를 썼습니다. (링크)

【2.과녁 없는 집중의 시대 : <집중력 설계자들>】

과녁을 마주한 양궁 선수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무거운 활을 든 채 과녁을 향해서만 온 정신을 집중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장면에서 과녁을 치워버리면 어떨까요? ‘그냥 활을 들고 있을 뿐인 사람’이 되겠죠. 게다가 다들 그러고 있다는 이유로 놀지도 못하고 각자 평생 활을 들고만 있는다면 어리둥절해질 것입니다.

좀 우스운 헛소리 같지만, 저는 최근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굉장히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

<집중력 설계자들>은 중세사학자 제이미 크라이너가 쓴, ‘중세시대 수도자들의 엄청난 집중력 수련’에 대한 흥미로운 역사서인데요.

중세 초기 역사를 연구하는 미국 조지아대학 역사학 교수 제이미 크라이너 (왼쪽) <집중력 설계자들The Wandering Mind>의 이탈리아어판 표지. 악마(?)가 낚싯대로 수도자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실제 중세 문헌에서는 산만함을 (신에게 '집중'하는 걸 막는) 악마로 표현한 경우도 많았다고 하죠. 한국어판 부제는 '몰입의 고수들이 전하는 방해받지 않는 마음, 흔들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 UGA Research, Il Saggiatore

얼핏 보면 중세시대 수도자들의 집중력 꿀팁을 전수해주는 ‘실용서’ 같은 느낌도 들지만, 대체로 아래와 같은 팁들이 잔뜩이라 실용적인 조언을 원하며 책을 펼쳐든 사람들이라면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 수도자들은 잘 쉬어서도 안되었다. 수면을 제한해야 집중력과 민첩성이 향상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때로는 천장에 매단 줄에 몸을 묶은 채 서서 자기도 했다 [...] 시조에스 사부는 절벽에 몸을 매달아 두려움에 떨며 깨어 있었다.

* 안토니우스는 하루 한번 빵과 소금을 먹었는데, 간혹 식사를 아예 거르기도 했다 […] 게오르기우스는 야생 케이퍼만 먹고 살았는데, 어찌나 쓴지 낙타가 먹고 죽기도 했다. 베스 코카의 요셉은 조리된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다. 한 원로는 작은 오이가 먹고 싶어지자 입에 넣지 않고 벽에 걸어놓았다. 그렇게 해서 “애초에 그런 욕망을 품었던” 자신을 꾸짖었다 [...] 마음이 허기에 노예처럼 “휘둘리거나” 포만감에 “질식되고 멍해지지” 않게 했다.

-제이미 크라이너, <집중력 설계자들>(이하 동일)

그런데 제가 이 책을 오늘 함께 읽기 위해 가져온 이유는, 단순히 이들의 경악할만한 집중력 꿀팁에 깜짝 놀랐기 때문이 아니라 - 이 책을 읽는 내내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수도자들은 적어도 삶을 관통하는 강력한 목적(종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집중력을 지키기 위해 갖가지 방식들을 동원해 ‘집착’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사람들은 얼마나 삶의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까지 모두들 집중력 문제를 신경 쓰고 있는 걸까?)”

*

저는 이 책에서 ‘산만함을 이기고 집중하기 위한’ 근본적인 요인들을 세 가지로 꼽아보았습니다.

1.#스마트폰이 문젠가?(How) : 산만함은 ‘바깥’ 탓이 아니다

2.#목적(What for) : 집중력을 위해서는 가치있는 목적이 가장 중요하다

3.#뭐가 집중이고 딴짓인가?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1. 우선 ‘스마트폰이 문제인가?’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앞서 독특한 수도자들의 습관들을 소개했습니다만, 사실 이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저렇게까지 극단적인 사례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중세에도 모든 것이 단절된 수도원에서만 사는 경우보다도 속세에서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죠.

그리고 속세에서 신을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수도자들에 비해 독실하게 방해물을 이겨내고 목적을 이루어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책에 등장한 한 독실한 여인은 불행한 과부를 집에 거두어 신의 이름으로 돌보는데요. 과부는 고마워하긴커녕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렸지만, 여인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평소처럼 기도했죠.

반면, 집중하기에 완벽해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 트집을 잡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내가 집중하지 못하는 건 냄비, 독서 탓(?)이라고 핑계대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 7세기에 유대에서 가장 유명한 수도원 중 한 곳의 지도자는 “우리 아버지들 시대엔 산만함을 피하는 게 무척 중요했다. 이젠 냄비와 수공예가 우리를 지배한다”고 한탄했다.

* 수도자가 책을 읽는 동안 산만해지게 하는 진짜 촉매제는, […] 아케디아*라고 부르는 상태였다 […] 호기심noiseness이라고 부른 증상, 즉 수도자의 불안과 불만이 겹쳐 어떤 일의 수행이나 생각을 어렵게 하는 증상과 같았다. 아케디아가 책 때문에 일어나지는 않았다. 수도자는 책 한 권 없이도 아케디아의 먹잇감이 되었다. 하지만 책은 그 정도를 심화할 수 있었다. 안그래도 갈등을 겪고 있던 차에, 수많은 페이지와 심미적 요소, 베개로 삼을 만한 두께 등 특히 코덱스의 기술적 측면에 수도자를 자꾸 딴생각에 빠트렸다.

*아케디아akedia = 그리스어로 나태, 무관심, 무기력을 뜻하는 말 (링크)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공부를 하려고 앉으면 심지어 지우개똥과 책상 청소마저도 재밌어하던 제 모습을 떠올렸는데요.

즉 결국 중요한 건, 바깥의 방해물보다도 자기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2. 이어, ‘목적’의 문젭니다.

앞서 ‘활 든 사람’의 예를 들었었는데요. 집중력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목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애초에 ‘집중’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어딘가에 매진하다’라는 뜻이니까요.

여기서 ‘어딘가에’가 없으면, 마치 목적을 정해두지 않고 일단 냅다 전력질주하는 자동차나 다름 없습니다.

단순히 목적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목적이 삶을 관통하는 가치 있는 것일 필요성이 있죠. 그래야 우리는 어떤 것에 삶을 온전히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산만함을 해결하려면 완전히 집중하기 위해 악전고투할 가치가 있는 대상을 반드시 찾아야 했다. 애초에 신성한 질서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면, 집중력은 도덕적으로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갈등과 통제 문화의 목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산만함을 무조건 극복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곤 하는데요. 사실 자연상태에서 만약 뚜렷하고 가치있는 목적이 없다면, 계속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쪽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배도 딱히 안고프고 사냥감도 없는데 24시간동안 초집중한채 온신경을 쏟고 있는 포식자를 떠올려보면 이게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지 알수 있겠죠. 차라리 느긋하게 졸고 하늘이나 좀 쳐다보며 장난치는 쪽이 좋습니다)2)

중세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수도자들조차도 산만함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고 스스로를 평생 닦달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산만한 마음The Wandering Mind’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니까요.

오늘날 우리는 무심코 SNS나 유튜브, 쇼츠 등을 산만하게 만드는 '원흉'으로 여기고 마치 그것이 사라지면 집중과 행복이 저절로 오는 것처럼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 중세시대 수도자들도 집중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왼쪽) 6세기, 두팔을 옆으로 뻗은 채 기도하는 아폴리나리스 성인의 모습. 과거 수도자들은 기도할 때 산만해지지 않기 위해선 "두팔을 옆으로 떨어트리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팔이 아파서(...) 집중을 하게 된다는 거죠. 이렇게까지 하며 집중한 이유는, 그럴만한 중요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위즈덤하우스, Wiki commons

그럼에도 중세시대 수도자들이 꾸준히 집중을 위해 노력하고 - 산만한 마음을 이겨내는 집중력을 심지어 ‘윤리’의 영역으로 보았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평생을 신에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즉, 수도자에겐 모든 삶의 사소한 즐거움들을 다 희생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충분히 가치있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때때로 마음이 흐트러져도 자신을 다잡을 수 있을만한 충분한 계기가 있는 것이었죠. 그 목적이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에요.

*

사실 제가 “(목적이 없는 시대니까) 우리는 더 가치있는 목적을 세워서, 더 가열차게 집중해야 한다!”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엄밀하게는, “딱히 가치있는 삶의 목적이 없는데도, 왜 오늘날 집중력에 대한 환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해야 하는가?”입니다.

그리고 이는 거꾸로, 우리가 ‘목적’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을 좀 더 이어가봅니다.

2) 좀 엉뚱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 '거의 무료에 가까운 돈으로, 가성비 있게 산만해지는(=집중력을 잃는) 일'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오히려 (일견) '축복'이라고까지 볼 수도 있습니다. 일단 이 책에서도 나왔듯 정신을 바짝 차려 궁극의 집중력을 추구했던 수도자들은 당시에도 아무리 많이잡아봐야 5~10%를 넘지 않았을 것이고,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일하는 시간을 빼곤 집중력을 적당히 잃고 '시간을 죽이는' 일, 끔찍한 권태(링크)를 없애는 일이 삶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시간을 죽이는 일에는 돈이나 창의력이 필요했죠.

【3.뭐가 집중이고 뭐가 딴짓인가?】

이상 집중력이란 바깥의 방해라기보다는 자기 마음의 문제이고(1), 집중력 그 자체보다도 삶의 진정한 목적(가치)이 중요하다(2)는 이야기를 해보았는데요.

이어, 중요한 주제가 등장합니다.

3. ‘뭐가 집중이고 뭐가 딴짓인가?’하는 문젠데요.

핵심부터 말하자면, 설령 제 나름대로 목적을 세우더라도 완벽한 집중이란 불가능하다는 - 오히려 권장할만하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는 통상 ‘집중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동굴같은 방 속에서 모든 외부의 방해로부터 단절되고, 모든 잡다한 욕망을 이겨내고 오롯이 혼자 힘으로 존재하는 사람을 상상하곤 합니다. 자신의 역량만으로 서있고, 자신의 명성과 성과를 위해, 자신의 능력만을 발휘하면서요.

하지만 설령 수도자들에게 신에게 헌신하겠다는 ‘목적’이 있더라도 여기엔 커다란 함정(?)이 있었습니다.

신에게 헌신하겠다는 목적 [자체]가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겁니다. 또한 그 자신도 세상에서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될 순 없고요.

실제로 중세시대의 수도자들은 신에게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하고서도, 자신과의 투쟁 외에도 - 바로 그 목적 자체 때문에 극심한 산만함과의 투쟁을 겪어야했습니다.

왜냐면 신을 섬긴다는 것은 곧 가르침을 대중에게 전파하고, 곤란함에 처한 손님을 돕고, 환대하고, 그들의 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고민해준다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일부 수도자들은 그런 ‘의무’들로부터 도망가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결국 진지하게 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그러한 산만함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 단절을 위한 맞춤 공식 따위는 없었다. 수도자마다 다른 방법을 동원했다. 무엇을 ‘세상’으로 간주하고 무엇을 ‘포기’로 간주할지 결정하는 일은, 애초에 구분짓기 어려운 것을 굳이 구분 짓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하나님에게서 어떻게 분리될 수 있겠는가. 자아가 전체 우주 체계 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윤리적 의무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 수도공동체는 대중에게 구호품과 의료 지원 등 여러 서비스를 제공했다 […] 참회 센터의 역할도 했다. 대부분의 수도자도 구내에 찾아오는 손님, 특히 도망자나 여행자를 반갑게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도자들은 이러한 업무와 돌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일을 도덕적 의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마음이 흐트러질까봐 염려하기도 했다 […] 수도자들은 자기 수양과 환대라는 서로 상충하는 책임에 관한 이야기를 수세기동안 주고받았다 […] 핵심은 방해 요소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 세기가 흐르면서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영적 집중력을 흩트리는 대중을 위해 그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역설에 발목이 잡혔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큰 느낌표가 떠올랐습니다.

꼭 종교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 종류의 일에도 적용이 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요. 예를 들어 환자의 건강을 치료하는 의사가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 위해선 과연 동굴 속에서 도를 닦기만 해야할까요? 때론 환자의 다양한 삶을 듣고 적당히 해찰, 간섭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연구자의 일은 혼자서 자신의 연구에 ‘집중’하기만 하는 걸까요? ...

우리는 개미 발소리조차 나지 않을만큼 '고요한' 수도원을 상상하곤 합니다만, 사실 많은 수도원들은 순례자, 가난한 사람 등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왼쪽) 시든 꽃, 쓰러진 고양이, 아픈 친구 등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눈을 돌리고 오직 성적을 위해서만 '집중'하는 교육을 풍자한 장도리 만화. 오늘날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온 '집중'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그 집중에는 타인의 불행, 세상을 향한 주목도 포함될까요? - 4컷만화 전체는(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University of reading(링크), 경향신문

거의 모든 목적은 애초에 세계와 연결이 되어있고, 그 목적에 집중하는 게 세상과의 단절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편견’과는 다르게요.

사실 ‘산만함’이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항상 부정적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립적인 개념으로 다루어지기도 했죠.

스토아학파는 방해받지 않는 철학자들도 잠재적으로 다른 식의 산만함을 경험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바로 뜻밖의 대상과 마주칠 때 였다. 인간은 흔히 자신이 원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일에 직면하게 되는데, 스토아 학파는 이러한 마주침을 ‘조우’라고 불렀다.

연극의 한 장면, 소득 격차에 대한 갑작스러운 인식, 친구의 죽음처럼 어떤 상황을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조우는 대개 개인이 통제할 수 없으나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은 통제할 수 있으므로, 결국 그 반응이 진짜로 중요하다고 스토아 학파는 주장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는 예전에 인상깊게 본 네컷 만화가 떠올랐습니다. 오직 학교 공부에 ‘집중’하며 어릴 때부터 시든 꽃, 아픈 고양이, 쓰러진 친구 등을 모조리 무시하다보니 결국 ‘괴물’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는데요.(상단 그림)

사실 자신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 등을 생각하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이익 만을 위해 ‘집중’하는 일, 그리고 그런 사람들만 가득한 상황은 오히려 사회를 더 나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산만함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고, 또한 과거 수도자들은 결코 이런 종류의 ‘산만함’을 ‘극복’하려고 하진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어떤 것이 이겨내야 할 산만함이고 어떤 것이 추구해야 할 가치인지를 궁리하며 묵묵히 나아갔을 뿐이죠.

【4.‘집중’해서 ‘낭비’한 이상한 천재】

이처럼, 집중을 하기 위해선 목적이 필요하지만 그 목적은 반드시 ‘명쾌하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누구보다도 집중력과 산만함 사이를 치열하게 삶으로 고민한 인물, 굉장히 엉뚱하고 흥미로운 한 인물의 생애를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이 쓴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는 우리나라에선 다소 낯선 사람일 수 있는 알렉산드르 류비셰프(1890~1972)라는 소련 과학자의 삶을 다룬 짧은 평전인데요.

실은 이 과학자는 자신이 이룬 업적 그 자체보다도 ‘강박적인 시간관리법’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20대에 이미 과학에 삶을 투신하기로 결정한 뒤, 이후 50년이 넘도록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신의 매일매일을 5~10분단위까지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대략 이런 식입니다.

1964년 4월 7일, 울리야노프스크,

* 곤충분류학 : 알 수 없는 곤충을 두 점 그림, 3시간 15분.

* 어떤 곤충인지 조사함 - 20분 (1.0).

* 추가업무 : 슬라바에게 편지 - 2시간 45분 (0.5).

* 사교업무 : 식물보호단체 회의 - 2시간 25분.

* 휴식 : 이고르에게 편지 - 10분.

* 울리야노프스카야 프라우다 지誌 - 10분.

*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 이야기> - 1시간 25분.

기본 업무 - 6시간 20분.

1964년 4월 8일, 울리야노프스크,

* 곤충분류학 : 어제 그렸던 곤충의 정체를 완전히 밝혀냄 - 2시간 20분.

* 이 곤충에 대한 논문 집필 시작 : 1시간 5분 (1.0).

* 추가 업무 : 다비도바야와 블랴헤르에게 편지, 여섯쪽. 3시간 20분.(0.5).

* 이동 : -0.5.

* 휴식 : 면도, 울리야노프스카야 프라우다 지誌 - 15분, 이즈베스티야 지誌 - 10분.

* 문학신문 - 20분, 톨스토이의 <흡혈귀> 66쪽 - 1시간 30분.

*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황제의 신부> 감상.

기본 업무 - 6시간 45분.

-다닐 안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이하 동일)

게다가 위에서처럼, 단지 하루치의 시간만 계산한게 아니라 1년, 5년 단위로도 시간을 계산했는데 - 이런 치밀한 시간관리를 통해 평생 70여권의 학술서를 쓰고 1만 2500장이 넘는 논문, 글을 써내고 자신의 ‘본업’인 생물학에서 뿐 아니라 문학, 역사학, 철학, 평론 등에서까지 방대한 지식을 쌓고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얻은 전설적인 인물이죠.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책 표지. (왼쪽) 1925년, 그가 35세였던 해 5월 한달간 사용한 시간 내역을 정리한 메모. 맨위부터 '강의 세미나(20시간10분), 교육 준비(12시간15분)...' 등이 이어집니다. 재밌는 건 '잠(249시간55분), 먹기(58시간30분), 집안일·사람과의 소통 등 예상치못한 시간소모(87시간)' 등의 항목도 포함돼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스마트워치같은 것도 없었을텐데 어떻게 정확히 5분단위까지 수면시간을 측정했을까요? / 황소자리, vivovoco(링크)

이때문에 이 책은 세계적으로 ‘시간관리, 집중력에 대한 자기계발서’로 유명하기도 한데요.(실제로 류비셰프의 이름을 검색하면 대부분 시간관리법에 대한 것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시간과 집중력에 대한 자기계발서로 읽는 것은, 마치 햄버거를 사서 햄버거는 버리고 껍질만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해왔습니다.

*

류비셰프라는 인물이 흥미로운 건 단순히 그가 50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시간을 강박적으로 관리해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까지 강박적으로 관리한 시간을, 아낌없이 낭비했다는 점이 진짜로 재밌는 지점입니다.

책의 전반부는 주로 류비셰프가 ‘어떻게’ 시간을 관리하고 꾸준히 학문을 진지하게 연구해갔는지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그는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그닥 부유하지 않은 가문인데다가 자신의 과학 목표 외에는 명예나 출세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항상 돈을 벌기 위해선 일을 해야했죠. 기차를 타며 비평을 쓰고, 회의 시간 딴짓마저도 수학문제풀기(!)에 쓸 정도로 틈새 시간을 치밀하게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책의 중반부 이후부터는 점점 ‘강철같이 자신의 목적에 봉사했던’ 류비셰프라는 철인의 이미지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얼핏보면 그는 완전히 메마른 집중력, 생산성 기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그 시간들을 어떻게 썼나 하고 곰곰 살펴보면 그는 실은 꽤 쓸데없는데에 시간을 마구 써버리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책을 쓰면서도 여러번 진심으로 당황한 기색입니다.

* 그토록 철저히 계산, 분석했던 시간을 도대체 왜 엉뚱한 곳에 다 써버린단 말인가? 그의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은 그를 점점 더 자주 책망했다. 그가 생물학 전반에 대한 대작을 쓰기 시작할 때에도 과연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됐다

* 류비셰프는 삶이 곧 시간이었기에, 시간에 대한 경건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는 길은 종잡을 수 없었다. 옆길로 새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이 하던 일을 중단하고 오랫동안 다른 일에 몰두한 적도 있었다.

류비셰프는 자신의 ‘전문분야’만 파고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칸트에 대한 100쪽이 넘는 비평을 쓰기도 하고, 많은 문학 서적에 대해 비평을 해서 글을 싣기도 했고, 역사에 일가견을 가져서 많은 역사학자들과 교류하기도 했죠. 이처럼 자신의 ‘본업’이 아닌 글을 자꾸 쓰는 류비셰프를 두고 동료들은 고개를 저으며 진심으로 만류했다고 합니다. 그런 ‘도움도 안되는 쓸데없는 일’을 열심히 하지 말고 네 업적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하라고요.

하지만 그는 그냥 계속 딴짓을 합니다.

왜냐면 그는 시간은 관리할 수 있을지언정 자신의 호기심마저 관리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가 태생적으로 시간 관리를 하듯이 그는 태생적으로 타고난 자신의 호기심 역시 호쾌하게 쫓아가기로 결정했죠. 그는 모든 것의 본질을 파고들었고, 궁금한 문제에 맞닥뜨리면 본격적으로 그것을 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산이 앞에 있기 때문에 산을 오르는 사람처럼요.

그런 ‘딴짓’은 간혹 자신의 ‘본업’과 이어지기도 했지만, 애초에 그에겐 본업에 도움이 될 것인가 자체가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냥 재밌어서 한 거니까요.

* 1953년에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생물학계를 지배하는 리센코의 이론에 대하여>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쪽에 불과하던 짧은 글을 결국에는 700쪽이나 되는 엄청난 논문으로 발전시켰다. 1969년에도 느닷없이 <과학사의 교훈>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또 자기 아버지에 대한 회상록도 쓰고 문학 전문지에 글을 싣기도 했다 [...] 그냥 류비셰프가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면 된다. 그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관여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전공 학문과는 무관한 논쟁에 휘말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 류비셰프의 시간통계 방법은 논리적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그리고 이성적으로 매사를 결정하게 만드는 도구였다 […] 하지만 시간통계 방법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바로 류비셰프가 자기의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할 때였다.

* 류비셰프와 동료들은 단테를 원어로 읽고 일부분을 암기까지 한 상태로 논쟁할 수 있었다 […] 그들은 고전뿐 아니라 당대의 러시아 문학은 물론이고 위고와 괴테에 대해서도 훤히 알고 있었다 […] 그는 문학을 연구하고자 작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예술을 소비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읽고 보고 들은 것에 대해 꼼꼼히 분석을 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것이다. […]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거기서 얻는 즐거움도 커졌다. 한 편지에서 그는 실러의 <마리아 슈투아르트>와 <오를레앙의 처녀>를 인용하고 있다. 문장을 인용하는 데서 출발했다가 결국은 한 장면 전체를 다 쓰고 말았다. 좋아하는 문장을 옮겨쓴다는 즐거움에 빠져 정신없이 몰두하게 된 것이리라 [...] (과거에) 학자는 자기 학문과 전체 문화 사이의 조화를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 오늘날 이런 협력관계는 파괴되었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보니, 사실 그의 평생 쓴 글들에 비해 직접 출간된 책들은 굉장히 적은 편이라고 합니다. 딱히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지도 않고요. 애초에 그는 ‘책을 쓰기 위해’ 글을 쓴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

또한, 그의 삶에서 가장 ‘궁극적인 낭비’로는 편지쓰기가 있을텐데요.

류비셰프는 아끼고 아낀 시간에 편지를 엄청나게,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여 씁니다. 저자는 특히 가족이나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닌 ‘학술적 목적’의 편지에 주목하는데요. 편지 한 통이 거의 한편의 논문 수준인 경우도 많았는데, 이런 편지를 1969년 한 해에만도 무려 400여통을 받고 280여통을 썼다고 합니다. 거의 하루에 한 통 꼴이었죠.

* 그가 유일하게 시간을 ‘호사스럽게’ 썼던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서신 교환이었다 […] 내가 주목하는 것은 업무적인, 그리고 학문적인 서신 교환이다. 이런 편지 중에는 빽빽하게 타자된 종이로 열장, 스무장씩이나 되는 것도 있다. 그 내용은 상대로부터 받은 논문 초안에 대한 의견, 서적 비평, 다양한 논문들에 대한 검토 등 다양했다. 사람들이 류비셰프의 의견을 구하고자 했던 문제는 정말이지 무수히 많았다! 테아르 드 샤르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텔레파시의 존재를 인정하는지, 생물체의 적응 문제에 대한 의견은 어떤지, 카오스의 본질은 무엇인지 […] 서신만 모은다 해도 현대의 자연 연구, 철학, 역사, 법학, 연구방법론, 윤리학 등 각종 문제가 망라된 두꺼운 백과사전이 만들어질 정도이다.

[...] 이는 힘의 분산이며 모순되는 일이다. 자투리 시간을 모아 절약해둔 시간을 편지에 낭비하다니 […] 하지만 류비셰프에게는 다른 원칙이 존재했다. 논문이나 책이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라면 편지는 답장을 기다리는 수신인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편지를 기다리는 그 사람이 류비셰프에게는 시간보다 더 소중했다. 참된 의사가 단 한명의 환자를 위해 온갖 치료법을 개발하듯 류비셰프는 누군가 자신을 원할 때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다.

* 편지는 류비셰프가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소박한 방법이었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오면 그는 자신의 이해득실이나 시간상의 손해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상대의 논문에 대한 그의 평가나 조언은 실상 광범위한 분석과 비평이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아무런 사심 없이 그 방대한 작업을 해준 것이다. 사소한 오류에서부터 논리상의 허점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잡아내는 편집장의 역할을 다하며 유익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사람, 아니 전혀 이름 없는 사람이 부탁을 해와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류비셰프가 서신 교환을 통해 해낸 일은 수십명의 직원을 둔 ‘학문 서비스 센터’ 전체의 업무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학문적 충고에 국한되지도 않았다. 도덕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상담도 있었다. 그는 스승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상대를 꾸중하고 가르쳤다...

이에 대해 저자는 결국 대체 류비셰프가 왜 이렇게 낭비를 했는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내놓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류비셰프에게 있어, 편지는 ‘낭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과학에 헌신하겠다는 목적 자체가 결코 자신 혼자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뿐더러, 본업만의 문제도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쇠같은 집중력을 발휘하며 시간을 강박적으로 사용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명예와 명성, 능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인류의 과학이라는 ‘사명’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에 헌신하는 일은 가치도 있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는 녹색잎이 햇빛을 끌어당기듯 탐욕스럽게 시간을 그러모으고, 1분을 하루처럼 썼습니다. 그리고 햇빛이 자연스럽게 땅 위 모든 생명에게 닿듯, 자신의 재능을 자신의 명예나 부가 아닌 자신의 순수한 호기심과 세계를 위해 ‘써버렸’습니다.

그런 방식의 집중력이란 애초에 세상과 끊어진 채로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류비셰프에게 있어서 시간은 그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 시간은 류비셰프가 학문을 연구하고 일을 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류비셰프는 학문을 연구해야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고 바로 그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1분 1초까지도 철저히 계산하여 최대한 시간을 아꼈습니다.(파벨 스베틀로프)”

【5.맺음말】

저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곰곰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집중력 문제'를 겪고 있다고 할 때,

어쩌면, 그 진짜 이유는 - 우리 신경을 소란하게 만드는 짧고 화려한 영상의 홍수라기보다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누구와도 진심으로 교류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부·명성과 능력만을 갈고 닦고, 내게 ‘이익’이 되지 않는 세상일엔 한사코 한눈을 팔지 않는 삶의 방식이 [노잼]이라서 그런 게 아닌가 하고요.

보람과 재미가 없는 일에 집중력을 쏟을 수 있을까요?

만약 류비셰프에게 편지를 쓰지 못하게 하고, 본업에만 '집중'한 채 다른 방향의 호기심들을 '효율적으로' 억누르라고 했다면 그는 슬퍼하며 시간관리를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시간관리법은 대체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류의 '생산성'이라든지 '효율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죠. 그는 전혀 모르는 세계에 질문을 던지고, 바닥부터 전제를 뒤집고, 위태롭게 자기 힘으로 생각하고, 생판 모르는 사람을 향해 편지를 쓰면서 연결되어있음을 실감하는 것으로부터 진심으로 재미를 느꼈고 이 재미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선 시간을 아껴쓸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저 역시 인스피아를 '분야'를 딱 정해, 나의 지식과 명성을 쌓고 뽐내는 목적으로, 해찰이 아닌 실용적인 목적에만 집중하는 방식으로 쓰라고 했다면 금세 지치고 기쁨과 흥미를 잃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고요.

*

이상 집중력이라는 키워드로 이런저런 약간은 엉뚱한 해찰을 해보았습니다만,

이번 기회로 연구자님께서도, '어떻게' 집중력을 높일지에 대해 뿐 아니라 - 나는 '무엇을 위해' 집중력을 높이고 싶을까?, 그리고 그 집중력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라는 낯선 질문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보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어쩌면 인간은 한눈을 팔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제이미 크라이너, 박미경 옮김, 『집중력 설계자들』, 위즈덤하우스, 2023.

-이 책은 사실 처음 출간되었을 무렵 이미 읽었던 책인데요. 책을 흥미롭게 읽고, 마음 속에 강하게 남았던 질문(대체 이 집중력이 다 무슨 <목적>을 위해서인가? 오늘날에 과연 그런 목적을 가진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이 이어져 이번 회차에 함께 써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레터를 읽고 나서 직접 책을 읽어보셔도 집중력과 관련되어 이런저런 생각할만한 거리를 많이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이상원 외 옮김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황소자리, 2020.

-이 책을 덮고나서 생각했습니다. 세상에는 이 책을 자기계발서로 읽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부류로 나누어질 것이라고요. 'How어떻게'와 'What무엇이'의 이슈가 거의 절반씩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실제 서문에서도 저자는 류비셰프가 '어떻게' 그런 강박적인 시간관리를 평생 유지했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지가 궁금했다고 쓰고 있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 '무엇이'는 결국 이타적이면서도 이타적이지만은 않은 '사명'과 연결이 됩니다. 짧고 간결하지만, 복잡하고 다양한 해찰거리들이 잔뜩이었던 책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전 읽기의 재미겠죠.

앤서니 그래프턴, 강주헌 옮김, 『편지공화국』, 21세기북스, 2021.

-<각주의 역사> 등을 쓴 앤서니 그래프턴이 쓴 '편지공화국'에 대한 책입니다. 아무래도 학술서인만큼 술술 읽히는 종류의 책은 아닙니다만 과거 '학술 편지'가 어떻게 지식의 가교가 되었는지를 알고 싶은 분이라면 일독을 추천합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구글 프로젝트, 전산화된 커뮤니케이션, 토론의 상실 등의 현재적인 이야기와 연결이 되는 책입니다.

사실 이번 회차를 쓰기 위한 책으로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를 가장 먼저 선정했고, 이 책이 (위에서도 말했듯) 압축적으로 쓰인만큼 무한히 가지를 뻗어나갈 수 있을 만한 책이었기 때문에 다른 책을 어떻게 연결해야할지가 꽤 고민되는 일이었고, 이 책은 다른 한 권의 책(링크)과 함께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책이었습니다. 두 책 모두 재미난 책이라, 언젠가 레터에서 다룰 수도 있겠네요.

【글 속 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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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력은 ‘좁은 점’인가?

독서시간: 약 3분 / 글자수: 약 1200자

🖍글 속 한 문장

“그보다 나는 작가 요한 하리가 강조하는 집중력이 좁은 한 점만을 응시하는 ‘스포트라이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철학자 제임스 윌리엄스는 그것이 집중력의 첫 번째 층일 뿐이라고 말한다. 집중력의 두 번째 층은 스타라이트(별빛), 세 번째 층은 데이라이트(햇빛)다. 길을 잃더라도 장기적 목표를 알려주는 별빛 같은, 내가 서 있는 곳을 깨닫게 해 주는 햇빛 같은 집중의 형태를 의미한다. 이런 집중을 하려면 성찰과 사색을 위한 여백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시간을 잃어가고 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을 바탕으로 집중력에 대해 쓴 칼럼입니다. 칼럼에 따르면 요한 하리는 이 책에서 집중력을 단순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여러 층위에서 설명했다고 하는데요. 그중 가장 하나는 '스타디움라이트(경기장의 빛)'로, 모여 서로가 목표를 공유하고 힘을 합쳐가는 형태의 집중력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대체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집중력'을 이야기할 때는 대체로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는 책상에 붙여두는 포스트잇같은 느낌의 '목표'를 생각하게되곤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래왔고요. 하지만 이번 레터를 쓰면서 새삼 곰곰 생각해보니, 혼자 방에서 문을 걸어잠그고 책을 읽는 것조차도 '홀로 고요히' 하는 일 같지만 사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몇시간씩 수다를 떠는 것(혹은 듣는 것)입니다. 완전 분주하고 산만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죠.

“난 스마트폰 중독이야”라고 말할 때

독서시간: 약 9분 / 글자수: 약 4700자

🖍글 속 한 문장

내 책(<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늘 내게 이렇게 말하죠. “아 당신이 그 사람들을 어떻게 중독시키는지에 관해 쓴 사람이구만.” [...] 나는 사람들을 중독시켜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 우리는 자신이 중독되었기를 원합니다. 사실 그 말을 간절히 듣고싶어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중독이 있다면, 그 중독을 일으킨 나쁜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쁜 기술 대기업이 당신을 중독시킨다는 말은 당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도 되지요.

👤김스피의 블라블라

<훅> 등을 쓴 행동디자인 분야의 권위자 니르 이얄이 <방해받지 않기indistractable>를 쓴 뒤 진행한 인터뷰입니다. <훅>은 UX쪽에서 워낙 유명한 책이라, 굳이 읽어보지 않더라도 현시점엔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내용이 대부분인데요. 핵심은 "이용자에게 무언가를 '하게' 만들기 위해선, 욕망(습관)을 건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 한사코 자신이 '중독'을 거부한다고 하지만, 당시 그 책을 읽으면서 습관과 중독의 차이가 미미한 것 같아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인터뷰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은 '중독'이 아니면서도 스스로 중독이라고 말하길 좋아한다고 하는데, 왜냐면 그러면 이 모든 건 자신의 탓이 아니라 기업의 탓이 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저는 반쯤만 동의하는데, 동의하는 부분은 일단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6초 이후의 글은 낭비다

독서시간: 약 2분 / 글자수: 약 1100자

🖍글 속 한 문장

26초. “시선 추적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의 콘텐츠를 읽는 데에 평균 26초를 쓴다”고 한다. 새로 출간된 책 <스마트 브레비티>에 나오는 말이다. “26초 이후의 글? 낭비다.” 그렇다면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 “그냥 요점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곤 멈춰라.”[...] 그렇다고 나 같은 개별 창작자가, 읽히지 않을 창작물을 내놓을 수는 없다. “아무도 자신의 노래를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성공한 가수의 심정을 상상해 보라.

👤김스피의 블라블라

2023년 4월 28일, 공교롭게도 세계적으로 눈길을 끈 문제작 두 권의 한국어판이 같은날 출간되었습니다. 간결한 글쓰기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미국의 정치매체 Axios 창업자 등이 쓴 <스마트 브레비티>와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 그 두 권이었죠.

이 두권의 메시지를 이어본다면 "오늘날엔 사람들이 집중력이 떨어져 긴 글을 읽지 못하게 됐기 때문에, 창작자라면 26초에 읽힐만한 짧은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일텐데요. 저는 그게 잘 안돼서 여전히 긴 글을 쓰고 있습니다.

16세기 학자가 지금보다 많이 교류했다

독서시간: 약 6분 / 글자수: 약 2200자

🖍글 속 한 문장

(16~18세기) 편지 공화국에는 “수준별로 네트워크가 공존하며 다양한 유형의 계급 구조와 충돌했”고 “편지 공화국의 지리적 범위는 무척 넓었지만 편지는 국경을 쉽게 넘나들었다.” [...] 인류 역사상 학문적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근대 유럽에 견줘 오늘날은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 구글 제국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포괄적으로 색인화”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지만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는 “인간의 손이나 정신이 닿지 않는 텍스트를 세계의 독자들에게 쏟아내는 거대한 소방호스”일 뿐이라고 저자는 비판한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요즘은 편지를 쓰는 일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데요. 특히나 업무 관련한 이메일을 많이 쓴다고 하더라도 이는 '편지'라기보다는 그저 공문같은 느낌일 뿐이죠. 거기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담거나, 너무 길게 중언부언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잘 읽히지도 않을테고요.

하지만 16~18세기 문인, 학자 등은 서로를 향한 편지를 어마어마하게 썼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편지를 주고받는 데는 국경도 상관없었고, 거의 실시간으로 먼 나라의 지식이 실시간으로 공유되었고 학자들은 자주 공동 작업을 진행해갔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쓴 책이 앤서니 그래프턴의 <편지공화국>인데요. 그는 오늘날에는 비록 이메일, 줌회의, 온라인 논문 등 첨단 기술들이 생겨났지만 과거에 비해 훨씬 서로 학자들이 교류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읽고 쓰는 일 - 그것을 통한 '교류'는 데이터나 기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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