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핵심 반도체장비 분야에서 국내 기업들이 소송전을 불사하는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인 ‘TC본더’는 여러 개의 메모리칩을 쌓아 고대역메모리(HBM)를 제작할 때 사용되는 핵심 장비다. 또 다른 사례는 고압수소열처리 장비를 둘러싼 기술 분쟁이다. 이 장비는 원래 미국 개소닉스(Gasonics)사가 고압에서 산화막을 성장시키는 용도로 개발했는데 국내 기업이 수소열처리용으로 개조해 발전시켰다. 최신 반도체소자의 성능과 신뢰성을 크게 향상시키는 이 기술을 우리 기업이 독점하면서 업계의 화제가 됐다. 현재는 경쟁 제품을 출시한 다른 국내 기업과 소송이 진행 중인데, 흥미롭게도 ‘고압공정이 진행되는 부분을 여닫는 문고리 구조의 차이’라는 세부적인 기술적 요소가 쟁점이다.

이러한 일련의 분쟁을 두고 국내 기업 간 과열 경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우리 산업의 ‘성장통’이라는 관점으로 볼 수 있다. 경쟁사들이 쉽게 넘을 수 없는 기술장벽을 만들지 못한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 간의 치열한 도전과 응전을 오히려 세계적 수준의 ‘초격차 기술’을 확보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더욱이 반도체 산업은 큰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앞으로는 단순히 반도체소자를 미세화하거나 수백 층의 메모리 소자를 비싼 공정을 써서 한 번에 제작하는 방식보다, 다양한 반도체 칩들을 쌓고 이어 붙이는 ‘이종집적기술’이 본격적으로 활용될 전망이다. 새로운 소재와 장비에 대한 수요가 계속 증가하는 환경에서는 기술경쟁을 통한 경쟁력 강화가 더욱 중요하다. 이종집적기술의 확대는 반도체소자 기업은 물론 장비와 소재 기업들에도 엄청난 지각변동을 불러올 것이다.
세계 반도체장비 시장은 180조원에 달하는 거대 시장으로, 메모리반도체 시장 전체와 맞먹는 규모다. 현재는 ASML, AMAT, TEL, 램리서치, KLA와 같은 대기업이 시장의 약 70%를 장악하고 있다. 그동안 국내 장비 기업의 규모를 키워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수합병의 활성화 정책이 시도되었으나, 원천기술을 보유한 기업이 많지 않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최근의 국내 장비기업 간 기술 경쟁 추세는 상황 급변의 신호탄이다.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한 인수합병의 활성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반도체 패권경쟁과 관세 전쟁으로 이어지는 글로벌 산업 환경의 대격변기에는 변화 추세를 먼저 읽고 파도의 방향에 맞게 뱃머리를 돌릴 수 있는 노련한 선장 같은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치열한 경쟁이 낳는 혁신 기술들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으로 기대한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