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으로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저 믿으시죠?”
윤석열 대통령은 2일 충남 공주의 전통시장을 찾아 즉석에서 라디오 DJ를 자처했다. 바닥 경기가 겨울 날씨보다도 냉랭해지고 있을 때 ‘민생토론회’를 마친 후 전통시장의 상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DJ 부스 앞에 모인 주민들은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통령의 사진을 연신 찍으며 ‘윤석열!’을 연호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린 것은 바로 다음 날 밤이었다.
헌법에 규정된 계엄 요건인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와는 거리가 멀었던 대한민국은 느닷없는 계엄 선포로 외려 국가적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민주주의가 깊은 상처를 입었고 경제와 안보가 백척간두에 섰다. 지난 2주 동안 가까스로 계엄 해제,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의결이 이뤄졌고 한덕수 국무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불안정한 상태로 시작됐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이 벌어진 뒤 수습해야 일들이 첩첩이 쌓였다.
이런데도 계엄 사태의 최종 책임자인 윤 대통령이 탄핵심판을 앞두고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계엄 실패 직후 국민적 분노 속에 탄핵안이 가결될 조짐을 보이자 윤 대통령은 2분짜리 대국민 담화에서 선처를 구했다. “법적·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했다. 그랬던 윤 대통령이 ‘반국가적 패악, 광란의 칼춤’이라는 거친 표현으로 야권과 ‘반국가세력’을 공격하며 “국민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다”고 표변한 것은 불과 5일 후였다. 책임지겠다던 약속은 빈말이 된 것이다. 이후 압수수색과 소환 조사 거부 등으로 수사를 지연시키고 있다. ‘계엄 보스’의 입장이 정리되자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도 “자유 대한민국의 운명이 여러분께 달려 있다. 저도 끝까지 여러분들과 함께 싸우겠다”고 동조하고 나섰다.
윤 대통령의 태세 전환 배경으로는 여러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윤 대통령이 받고 있는 ‘내란 우두머리’ 혐의는 유죄 확정 시 최소 무기 금고·징역에서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 내란죄보다는 직권남용 혐의 선에서 방어하는 것이 법을 잘 아는 ‘피의자’로서 최선의 방책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 폭주하는 야권에 대응해 공동 투쟁하자고 지지자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정치적 방탄’의 노림수도 엿보인다. 윤 대통령이 헌정 질서를 훼손한 범죄를 진영 싸움으로 몰아가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국정농단으로 탄핵을 당한 후 탄핵심판과 사법 처리 과정에서 자중하는 모습을 보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과는 대조적이다.
백 번 양보해서 당사자가 자기 방어를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계엄과 탄핵에 대한 여당 등 보수 정치 세력의 태도다. 계엄 사태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윤 대통령과의 부적절한 관계 설정이다. 거대 야당이 그동안 포퓰리즘 정책, ‘이재명 방탄’ 등을 위해 부린 입법·예산 횡포 등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대화와 타협, 소수 존중과 같은 민주주의 원칙을 깡그리 무시하고 다수 의석을 앞세워 극한 대립 정치를 초래한 거대 야당에 대한 견제는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 목적을 위해 계엄을 발동한 국헌문란에 대한 단죄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게다가 수사에 협조하기는커녕 극렬 지지층을 선동하는 윤 대통령의 행태에 여당이 말려들어간다면 자칫 보수 궤멸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국민의힘(옛 새누리당)은 2016년 말 ‘탄핵의 강’을 제대로 건너지 못하고 보수 재건에 실패했다. 윤 대통령과 한동훈 전 대표, 두 검사 ‘용병’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방증이다. 보수 정치 세력이 두 번째 탄핵 앞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국민 상식에서 벗어난 행태를 보이면 탄핵의 깊은 늪에 빠져 복구 불능의 지경에 이를 수 있다.
보수 정당이 미래 어느 시점에 다시 국민의 선택을 받으려면 이번에야말로 환골탈태하고 탄핵의 강을 제대로 건너야 한다. 부정선거 음모론, 계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윤 대통령과는 명확히 선을 그어야 한다. 공정과 상식·시장경제 등을 중시하는 합리적 보수의 싹을 빨리 틔워야 수권(受權)의 시간은 앞당겨질 것이다. 특히 진영 논리에서 벗어난 중도층은 경제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이끌어내는 비전과 능력을 가진 합리적 시장주의 세력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여당이 ‘탄핵의 늪’에 빠지지 않아야 ‘유능한 경제 보수’도 회생할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