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는 사회 구성원 간에 사회적 귀천이나 직업에 따른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우리나라만 해도 헌법 제11조에 따르면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즉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사회적 지위나 직업의 귀천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 평등한 나라이다. 여기에 이견이 없고 우리는 그동안 이러한 평등권을 지켜 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시대에 따라 평등권의 해석이 다양해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평등권은 모든 기본권의 토대를 이루며 차별 금지라는 원칙을 통해 다른 기본권의 실질적 보장을 뒷받침하는 핵심 권리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과 국민의힘 최보윤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의료기사등에관한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발표되자 치과계는 물론 의료계 전체가 들끓고 있다. 이번 개정안은 의료기사가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지도’ 아래 업무를 수행하도록 한 현행 규정을 ‘지도 또는 처방·의뢰에 따라’로 변경하는 내용이 가장 핵심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나름 각 직종 간의 사회적 평등을 담아내려고 한 개정안으로 보였다.
과거 치과기공소를 차리려면 반드시 지도치과의사를 두어야 했고 지도치과의사는 치과기공소의 제작물을 점검 관리 감독하는 책임을 갖고 있었으나 치과기공사들의 꾸준한 개선요구로 2011년 10월 법 개정을 통해 지도치과의사제를 폐지시켰다. 치과기공사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역을 치과의사들이 지도 감독하는 틀이 족쇄로 여겼기에 평등권을 외치며 이 조항의 삭제를 원했었고 이를 국회가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당시에도 치과계는 반대했었다. 무면허 치과의사의 유혹에서 과연 치과기공사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실질적인 우려와 치과기공사들의 업무 영역이 치과의사들 진료행위의 일부로 치과의사의 지도가 없으면 정확하고 안전한 치과기공물을 제작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등 여러 이유에서였다. 즉 환자의 치료 과정에서 치과의사의 진료행위를 보조하기 위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치과의사의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논지로 기억한다.
물론 이미 시기가 한참 흘렀기에 지도치과의사제가 없어진 치과기공소는 보다 자유로운 영역에서 치과의사들이 의뢰한 치과기공물을 제작하는 직업적인 틀을 구축해 나간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치과기공사들은 14년 전 지도치과의사제를 없앤 후 그 다음 단계로 바로 이 개정안을 원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의 내용은 지도치과의사제 폐지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 반드시 막아야 한다.
이 개정안은 의료기사가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지도’ 아래 업무를 수행하도록 한 현행 법규를 불평등한 관계로 해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런 속내가 있었다면 이는 그 자체가 비논리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누구를 지도한다는 것을 마치 상하개념으로만 해석한 것은 ‘지도’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일어난 일로 보인다. ‘지도’란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목적이나 방향으로 남을 가르쳐 이끄는 것’을 말한다. 즉 가르쳐 이끄는 것이기에 상하개념으로 본 것 같은데 이는 직업적인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어의 제한된 의미에 집착한 결과다.
의료기사가 의사 또는 치과의사의 ‘지도’ 아래 업무를 수행하는 개념은 상하로서 지시받는 개념이라기보다 직업적인 역할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치과의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치과기공사나 치과위생사가 할 일이 있다. 이들 직업군의 목적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다. 환자를 진료하는 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진료의 주체자는 치과의사다. 즉 치과의사가 최종 환자의 질환에 대해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그 진료과정에서 치과위생사는 치과의사의 진료행위를 조력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것이며 치과기공사는 치과의사가 진단한 내용을 가지고 환자에게 가장 적합한 치과기공물을 만들어 내는 업무를 맡는 것이다. 즉 치과계 의료기사들은 환자진료라는 궁극적인 목적아래 진료의 주체자이자 최종 책임자인 치과의사를 도와 치과의사로 하여금 그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도록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변호사가 의뢰인을 변호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변론 준비를 하겠지만 부수적인 행정업무는 사무원들이 해 나가듯이 각자의 역할에서 맡은 바 일을 하는 것이다. 변호사가 의뢰인 변론에 필요한 행정업무를 사무원에게 ‘의뢰’하지 않고 ‘지시’를 내리는 것은 불평등한 관계여서가 아니라 역할에 따른 자연스런 과정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치과의사가 모든 일을 할 수 있지만 역할을 나눠 치과위생사와 치과기공사에게 역할을 맡겨 환자진료를 보다 빨리, 보다 효율적으로 해 나가는데 있어 ‘지시’를 내리는 것은 불평등한 관계라서가 아니라 진료행위를 위한 역할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치협을 비롯해 의료인 단체들은 이 법률 개정안대로 ‘처방·의뢰’를 한다는 것에 대해 이유 있는 반대를 하고 있다. 즉 ‘처방·의뢰’라는 개념으로 용어를 바꾸는 순간 환자 진료의 주도적인 역할에 혼선을 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단순 행정적인 절차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의료기사들의 독자적인 업무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두는 효과를 가져와 무면허 의료행위 등 예기치 않는 길을 열어 둘 가능성이 높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반면 당국은 ‘지도’라는 개념에 대해 ‘같은 의료기관 내에서 할 수 있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현재처럼 다른 공간에 있는 의료기사들에게 적용할 용어로 ‘처방·의뢰’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는 인식이다. 용어에 대한 협소적인 해석으로 이 개정안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매우 옹색하다.
버릴 것은 빨리 버리는 것이 좋다. 열심히 환자 진료 현장에서 노력해 오고 있는 의료기사들에게 희망고문을 하지 말고 의료체계의 본질을 인식하고 현행 법령에서의 ‘지도’라는 개념을 행정적인 절차에 불과한 용어로 대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의료체계의 본질을 망각하여 평등이라는 미명아래 의료직업군의 본질적인 역할을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 개정안은 철회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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