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 만세, 총독부 자진출두” 3·1절 비하, 일제가 원조였다

2025-04-22

이난향의 ‘명월관’

이난향의 ‘명월관’ 디지털 에디션

‘남기고 싶은 이야기-명월관’의 디지털 에디션을 연재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손꼽혔던 이난향(1901~79)이 1970년 12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중앙일보에 남긴 글입니다. 기생이 직접 남긴 기생의 역사이자 저잣거리의 풍속사, 독립투사부터 친일파까지 명월관을 드나들던 유력 인사들이 뒤얽힌 구한말 격동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후에 확인된 팩트와여러 등장인물 및 사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해 더욱 풍부한 스토리로 다듬었습니다.

제17화. 의암 손병희와 3·1 운동

고종 황제의 인산 날을 이틀 앞둔 1919년 3월 1일, 손병희 선생께서는 명월관 별관인 태화관으로 가기 전에 제동 자택에서 점심을 들었다. 이날 아침부터 여러 군데서 전화가 요란스럽게 걸려왔다. 그때마다 손 선생께서는 짧게 지시를 내리고 아무 말씀도 없었다.

오랫동안 손 선생 옆에 있어온 주옥경 선배도 이날처럼 근엄하신 손 선생은 일찍이 뵌 일이 없었다고 하며, 태산같이 무겁게 앉아 계신 위풍에 눌려 아무 말도 걸지 못했다는 것이다. 손 선생께서는 위장병이 있었기 때문에 단단한 음식을 못 드셨고, 주 여사는 곧잘 무를 썰어 넣은 곰국을 끓였다고 한다.

거사를 눈치챈 주 선배는 솜을 두둑하게 넣은 한복을 내놓았다. 외출복을 갈아입은 손 선생께서는 무엇인가 이상한 기분에 마루에 나와 서 있는 온 가족에게 천천히 말문을 여셨다.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들 안심하고 있길 바란다. 집에서 열심히 수도에 힘쓰라”는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자가용을 타셨다.

손 선생은 이때 자가용을 갖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한국 사람 운전사는 수가 많지 않아 대만 출신을 썼는데, 이름은 하라삼이라고 했다.

이날 아침, 손병희 선생으로부터 점심 손님 30여 명이 간다는 연락을 받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씨는 손수 나와 아랫사람들을 지휘하며 태화관 안팎을 말끔히 치우느라 바빴다. 하오 1시가 되었을 무렵,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던 것은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 선생이 오신다는 좌석에 기독교·불교 등 다른 종교계 인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불교 대표 한용운 스님이 들어서는가 하면, 기독교 대표 오화영 목사도 들어섰고, 오세창·최린·권동진씨 등 보기 드문 손님이 한방에 모이는 바람에 일하는 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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