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통화에서 주목받은 것은 관세도, 방위비 분담금도, 미국산 LNG도 아닌 ‘한 권한대행의 대선 출마’였다. 보도를 종합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인사말도 없이 “그런데 대선에 나갈 것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고민 중이나 결정 못했다”는 한 권한대행 답에 꼬리를 문 여러 해석이 주말을 지나며 ‘한덕수 차출론’으로 번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한 권한대행에게 대권 도전 의사를 물었을까. 인사치레로 던지기엔, 질문이 가볍지 않다. 한 권한대행 출마가 유력하다고 판단했을 리도 없다. 양 정상 통화는 한 권한대행 차출론이 본격 거론되기 전에 이뤄졌고, 거꾸로 트럼프 대통령의 질문이 차출론을 지핀 불씨가 됐다. 혹자는 중국 압박에 한국 협조가 절실한 트럼프 대통령이 한 권한대행에게 구애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놨는데, 그리 협조가 절실했다면 애초 한국이 ‘미국 삥 뜯는 국가’로 찍혀 관세폭탄을 맞는 일도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 질문은 ‘과시용’이거나 ‘압박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신의 대권 욕심을 알고 있다’며 정보력을 과시하거나 ‘당신은 대통령이 아니며, 두 달 대행에 불과하다’는 식의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전략이다.
상대가 난처할 질문·주제를 던져 협상 우위를 점하는 패턴은 트럼프 외교의 전형이다. 상대국 정상에게 인정사정없는 모멸과 당혹을 던지는 것도 그의 특기다. ‘당신은 카드가 없다’며 구박당한 우크라이나 대통령, ‘미국은 이란과 대화 중’이라는 폭탄선언을 맞은 이스라엘 총리가 가까운 예다.
진심은 빨리 드러났다. 아침에 통화한 트럼프 대통령은 저녁에 “전 세계가 ‘내 엉덩이에 키스’(kissing my ass)하려 전화하고 있다”며 “‘뭐든 하겠습니다’라며 안달이 났다”고 했다. 그날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한 사실이 공개된 외국 정상은 한 권한대행뿐이다. ‘대선 나갈 거냐’는 질문이 존중보다 조롱에 가까운 이유다.
이쯤이면 딱할 지경이다. 한 권한대행은 보좌하던 대통령이 헌법을 어겨 파면된 지 나흘 만에 전 세계를 혼돈에 빠트린 당사자에게 전화해 관세 선처를 읍소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통화에서 ‘대선 나가냐’ 이죽댔던 상대방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한 권한대행을 아첨꾼 취급하며 비웃었다.
수모는 자초한 것이다. 그는 파면된 정부의 이인자로, 비상계엄 사태와 국정 실패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통령 탄핵에 이른 국정 운영과 민심 이반도 그의 책임이다. 어떤 이는 그의 외교·경제 전문성이 대망론의 발판이라지만 지난 3년 한국의 외교·경제가 그의 작품이다. 하물며 국민 지지를 잃은 권한대행이 무슨 협상력이 있겠는가.
정상적인 행정부 수반이라면, 앞에서 숨기더라도 속에선 분개해야 마땅한 통화였다. 50년 이상 공직 대부분을 외교에 몸담아온 이에게, “마지막 소명을 다하겠다”며 배수진을 친 이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 정도의 분별도 없이, ‘대국의 승인’인 양 트럼프 대통령의 질문을 흘리는 행태가 지금 국무총리실의 수준이다. 행간의 본의는 지우고, 입맛에 맞는 사실만 포장하는 파면 정부의 잔재를 다시 보는 것 같아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