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우동, 끝내 세상 못 나왔다…주방서 떠난 50대 男의 수첩

2025-01-20

어느 유품정리사의 기록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의 말이라며 많이 인용되는 문구다. 비슷한 내용으로 화자를 고인으로 바꾼 시구도 있다.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어제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 1990년대 노래 가사의 한 구절이다.

평생 꿈을 좇던 남자가 끝내 그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형이 의뢰한 현장이다.

“원래 어머니와 동생이 이곳에서 함께 살았어요. 어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셨고 이후로 동생 혼자 살았어요.”

LH임대아파트 중에서도 가장 평수가 작은 곳이었다.

좁은 공간에 짐이 빼곡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물건을 정리하지 않고 계속 산 것이다.

두 사람의 유품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 옷가지들이 가득했다.

노인은 이미 떠난 젊음 대신 더는 입지 못하는 옷을 미련처럼 잡고 산 모양이다.

집 안 구석구석 물건 가득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고인이 살던 단지는 중앙난방이었다.

사후 2주 만에 발견됐다는데 난방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으니, 현장은 시취와 부패물로 가득했다.

“짐도 많고 환기도 많이 필요해 작업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시취가 심하다는 내 말에 뭔가 걸렸는지 고인의 형이 사정을 설명했다.

“작년 명절에 봤을 때도 건강했는데….”

동생은 나와 같은 연배의 50대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나이 든 남자 형제가 자주 만나진 않는다.

명절에 한 번씩들 보면 좋은 관계다.

동생의 사인은 심장마비로 인한 돌연사였다.

혹시나 해서 묻기를 꺼렸는데, 잘못된 선택이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시신이 2주나 방치되면서 이웃들 신고로 현장이 발견됐다.

그리고 유일한 가족인 형에게 경찰의 연락이 간 것이다.

작업 절차와 소요 시간을 설명해 주고 끝날 즈음에 다시 연락을 주기로 했다.

의뢰인은 멍한 표정으로 나서다가 문득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짐이 많긴 하지만 아마 동생의 수첩이 있을 거예요. 아주 오래된 건데. 그건 꼭 버리지 말고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오랜만이었다.

고인의 유품을 꼭 집어 어떤 것을 찾아 달라고 하는 부탁이….

그것도 돈이 되지 않는 물건을 말이다.

“네, 꼼꼼히 찾아보겠습니다.”

그 수첩은 대체 무엇일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질문을 삼키려 입을 꾹 닫았다.

시취를 없애려 약을 치고 부패물을 걷어내는 특수청소부터 했다.

짐은 많았지만 소위 ‘쓰레기집’은 아니었다.

최근까지 정상적인 생활을 한 사람의 집이었기 때문에 정리의 순서는 곧 잡혔다.

함께 간 직원과 방을 나눠 작업에 들어갔다.

유족이 부탁했던 ‘수첩’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외투 주머니에 무언가 비죽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수첩이었다.

소중해서 감춰둔 물건이 아니라 평소 늘 소지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두꺼운 수첩에 글씨가 빼곡했다.

이미 노안이 꽤 온 나는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함께 간 직원을 불렀다.

“용철씨, 이거 뭐라고 써 있어? 이분은 노안이 안 왔나 보네. 난 하나도 안 보여. 글씨가 너무 작아.”

“일본식 우동, 가쓰오부시 육수 내는 법….”

직원이 메모를 줄줄 읽었다.

사자(死者)의 공간에서 외람되게 시장기를 느낄 만큼, 맛깔나는 음식들의 레시피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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