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삼일운동은 언제까지 계속됐어요?”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이 우리 지역 울산에서는 4월 초에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의 눈이 커집니다. 전국 각 지역으로 소식이 전해져 만세 시위를 하지 않은 동네가 없을 정도라고 했더니 깜짝 놀랍니다. 요즘만큼 빠르지는 못하지만 꽤나 전파력이 있었던 100여 년 전의 통신망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이른 봄에 시작되어 1919년의 봄, 한반도 구석구석을 만세 소리로 물들였던 삼일운동이 어느 계절까지 계속됐을지 궁금해졌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1919년 3월, 4월에 시위가 집중적으로 일어났고, 그 이후에도 여러 지역에서 만세 시위가 계속됐습니다.
“지금 12월이잖아, 12월까지도 삼일운동이 이어졌을까?”
아이들과 시간여행을 떠나 봅니다. 1919년 12월로 시간을 설정하고 사건정보를 검색했더니 5건의 사건정보가 있습니다. 1919년 12월 2일에는 경성 훈정동 대묘 앞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박덕혜, 김효순, 간호부견습 노순경, 이도신이 저녁 7시경 대묘 앞으로 가서 2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월 8일에는 경기도 경성부 총독관저 부근에서 청원서를 가지고 배회하던 송교인이라는 유생이 체포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12월 11일에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배천에서는 기독교계 창동학교 학생 약 14~15명이 구 한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12월 19일 전라남도 여수군에서는 12월 20일 장날을 맞아 보통학교 학생들과 연합하여 시위를 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 10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만세 시위의 기록은 1919년의 마지막 날까지도 이어집니다. 12월 31일 밤 11시경 전라남도 진도군 읍내에서 진도공립보통학교 졸업생 11명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했습니다. 계절은 봄에서 겨울로 바뀌었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12월의 만세운동에서 간호부, 간호부견습생, 보통학교 학생 등 여성들과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서는 시간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유형, 행동 양상, 탄압 양상, 운동 매체, 운동 주체를 선택해서 관련 정보를 검색해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직접 선택해서 검색해보도록 했더니 운동 주체 중에서는 학생을, 운동 매체 중에서는 노래, 낙서를 많이 골랐습니다.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부른 것도 있을까?”
‘학생’, ‘노래’를 키워드로 찾아보니 11건의 사건이 나왔습니다. 만세 시위에서 누군가는 가사를 적어 나누어줬고 함께 노래하고 나팔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3월 3일 오후 1~2시경에 개성읍내의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수십 명이 읍내를 돌면서 노래를 부르고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경찰이 이들을 연행하자 1000~2000명의 군중이 모여들었고 시위는 밤늦게까지 이어져 자정이 되어서야 해산했습니다. 여러 사건 기록 속에서 학생들은 애국가, 독립가, 창가 등을 부르며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늦은 밤까지 광장에 모여 함께 노래를 부르고 행진하는 학생들의 삼일운동 모습, 오늘의 청소년과 청년들을 닮았습니다.
전 국민이 참여한 삼일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고 이 역사는 우리 헌법정신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삼일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첫 문장을 학생들과 함께 읽어봅니다. 우리 반 학생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단한 국민들의 나라’에서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일들이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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