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 이런 그림 있었다고?…비주류 자처한 진짜 예술가들

2025-04-18

“1960~70년대 우리나라에 이런 그림이 있었다고?” 지난 17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개막한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 전시는 놀라움을 자아내는 그림들로 가득했다.

몽글몽글한 핑크색 형체들이 동굴 종유석처럼 달려 있는 박광호(1932~2000)의 유화 ‘종유 환상’은 그 형체들이 인간의 가슴과 엉덩이를 연상시켜 에로틱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성적이지는 않고, 또 전체적으로 기묘하면서 조형적으로 아름답다. 설명 없이 보면 동시대 작가의 작품으로 오해할 정도로 현대적이다. 지난해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진 세계적인 작가 니콜라스 파티의 전시작 중 비슷한 느낌의 그림이 있었다. 그런데 박광호의 그림은 반세기 앞서 그려진 것이다. 그것도 추상화와 한국적 모티프의 구상화만이 각광받으며 주류를 이뤘던 70년대 한국에서 말이다.

신영헌(1923~1995)의 1960~70년대 그림에서는 대표적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의 영향이 강하게 보인다. 특히 달리의 ‘편집광적 비판 방법’, 즉 하나의 이미지가 이중의 다른 이미지로 보이게 하는 기법을 적극 응용했다. 신영헌의 ‘신라송’ ‘우국(임진록)-사명당’ 등은 민족 역사를 이중 이미지로 표현한 그림으로 ‘달리 기법을 노골적으로 모방하면서도 초현실주의의 초국가적 자유로움과 위배돼 정부 주도 민족주의에 편승했다’는 냉소를 받을 수도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함께 전시된 신영헌의 초기 작품을 보면 그가 당대 가장 ‘핫한 미술’이었던 앵포르멜(비정형) 추상화에 뛰어났으며 그럼에도 비주류인 초현실주의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즉 기회주의 작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추상주의적 아카데미즘을 지양”하는 신작가협회에 가입했다. 그 후 극소수의 미술계 관계자, 종교인과만 교류하며 작업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달리식 이중 이미지를 사용한 그림 중에도 황폐한 풍경 속에 끊어진 절벽이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무제’는 실향민인 화가가 분단의 아픔을 전달하는 작품으로 설득력이 있다.

한편, 깨진 창문에 여러 곤충이 붙어 있는 가운데 남녀의 얼굴이 어렴풋이 비치는 김욱규(1911~1990)의 수수께끼 같은 그림은 공포 스릴러 영화 포스터로 영감을 줄 만하다. 파리의 부티크 쇼윈도에서 본 장갑과 마네킹을 묘사한 김종하(1918~2011)의 ‘장갑’은 현실의 한 풍경이면서도 왠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낯익으면서도 낯선 언캐니(uncanny)한 느낌을 잘 살렸다.

이들의 작품은 무국적이다.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이 말한 “이성에 의한 모든 통제에서 벗어나 미학적·도덕적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고의 흐름”을 따르기 때문이다. 전시를 기획한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그렇기 때문에 ‘한국적’ ‘민족적’인 것에 초점을 둔 그간의 한국미술사 연구에서 조명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한 이들이 활동한 시기(1950~80년대)에 이미 초현실주의는 과거의 역사로 여겨지는 상태였다. 때문에 이들은 함께 모여 초현실주의 운동을 이끌 여건을 갖지 못했고, 각자 흩어져서 고독하게 작업에 몰두했다.”

박 학예연구사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초현실주의는 흔히 꿈·무의식·성적 욕망을 나타내는 예술로 여겨진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을 기존의 틀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혁명 혹은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초현실주의는 (인상주의나 입체주의처럼) 화풍·형식의 전환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의 전환이자 하나의 태도이다.”

그는 또 ‘국민 화가’ 이중섭의 그림도 분방한 욕망과 환상을 표현한 그림이 많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 맥락에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이 전시는 제1부에서 이중섭을 비롯해 이쾌대·천경자·박래현 등 우리가 잘 알지만 초현실주의 작가로는 생각지 않았던 작가들의 초현실주의적 면모를 재조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제2~4부에서는 그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6인의 작가들을 다룬다. 앞서의 작가들 외에 한국계 일본 작가 김종남(1914~1986)과 김영환(1928~2011)이 포함된다.

박 학예연구사가 6~7년 전부터 기획해온 전시로 오랜 기간에 걸친 기획이 돋보인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대중에 처음 선보이는 것으로 신선하다. 또한 같은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막스 에른스트나 조르조 데 키리코 등 서구 초현실주의 거장들의 영향이 너무 강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독창적이고 놀랍도록 21세기적인 작품도 있어 이들의 다양한 실험과 분투를 알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이들이 당대 주류에 끼지 않고 비주류를 자처하며 작품에만 몰두한 “진짜 예술가”였다는 사실이다. 박 학예연구사는 “가족의 희생도 컸다”며 “유족들이 언젠가 재조명 받을 날이 있을 것을 굳게 믿으며 작품을 보관해 왔기에 이번 전시를 열 수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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