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 특히 자신과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그가 비인간적인 상황에 놓였다는 이유로 그럴 수 있을까? 영화 ‘타인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영화의 배경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몇 해 전의 동독이다. 독재의 억압이 시민들의 일상을 사정없이 파고들고 있던 그때, 당국의 감시망에 한 유명 작가가 걸려든다. 그는 체제에 순응하는 듯하지만, 당국의 눈에는 왠지 미심쩍다. 최고의 정예 요원이 투입돼 작가의 집에 감청장치를 설치하고 그의 숨소리까지 엿듣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다. “우린 당의 칼이요 방패다.” 그토록 임무에 철두철미하던 요원이 작가에게 공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인이 장관에게 몹쓸 짓을 당한 데 작가가 좌절한 즈음부터다. 이어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가의 멘토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소식을 접한 작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소나타를 연주한다. 숨진 선생이 생전에 선물했던 악보다. 감청용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요원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요원은 허위 보고로 작가의 반체제 활동을 가려준다. 그렇게 감시자가 감시 대상자의 마음에 한발 한발 다가서는 과정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고 하지만, 가끔은 변하기도 하는 게 또한 사람 아닐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게 사람 아닐까.
공감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다. 공감의 물줄기는 약한 곳을 찾아 치솟아 오른다. 서로 경계 짓고, 의심하고, 배신하게 만드는 독재의 시스템마저 무력화시킨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 그 증거다. “이 곡을 진심으로 듣는다면 더 이상 나쁜 사람일 수 있을까?” 영화 속 작가의 한마디가 깊어가는 가을날 잔잔한 파문이 돼주길 기대해 본다.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