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통계학·전 고려대) 교수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역사학) 박사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9월 19일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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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제천 갈까 했더니 부림상회 사람이 와서 백운면 일이 여의치 않다기에 트럭으로 백운면 다녀오다.
원박리에서 온 소고기를 청전리 김노일(金魯馹)씨 댁으로 보내다. 오늘이 팔월 열나흗날.
저녁에 조합장 염수해씨로부터 찹쌀 한 말, 팥 한 말 보내오다.
9월 20일 개였다 흐리고 무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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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몸이 찌부둥해서 오전 중에 누웠다가 두 시 반 차로 원주행.
이상연(李上淵)씨 댁에서 떡 대접받고 원 남산국민학교인 신명여학교 교사를 둘러보다.
청소가 불완전해서 이런 데서 손님을 맞이할 작정인가 물어보았다.
학교의 운영에 미타한 점이 적지 않다.
첫째, 성실(誠實)을 기조로 하지 않고
둘째, 공사(公私)를 혼동하며 사정(私情)에 끌려서 입학을 허하는 등
셋째, 기금 적립에 있어서도 적은 고기에 눈이 팔려서 큰 고기를 놓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더욱이 심한 것은 기부금의 다과로 입학을 결하려 하는 예가 없지 않다. 재단 조성엔 손도 대지 않고.
이러한 불순한 씨앗은 언제든 여러 가지 난처한 결실을 할 것이다. 이씨의 말대로 사업은 반드시 가면과 술수가 필요한 것일까. 나는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사업일수록 성실로 일관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장래에 반드시 그 업보를 받게 될 것이다. 사정(私情)에 끌려서 부적격자를 입학시키면 후일에 어려운 문제를 빚어낼 것이며 입학을 금전으로 경매하면 학교의 신용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더욱이 한 번 교섭도 해 보지 않은 선생을 초빙해 오기로 십중팔구 내락을 얻었다 운운하는 것은 사회를 속이고 저를 속이고 남에게 누를 끼치는 것으로 언어도단이랄 수밖에 없다.
당장에 이러한 허위 불성실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으나 그에게 진 지난날의 신세가 너무나 커서 그러할 수도 없고 마음이 괴롭다.
우산리 이씨 댁에서 자다.
9월 21일 흐리고 무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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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나오면서
1. 정략적인 교원 채용을 중지할 일
2. 나이 많고 너무 굵은 학생의 입학을 취소할 일
3. 학교 경영과 교육과를 준별(峻別)할 일
등을 들어서 간곡히 요청했으나 모두 귀 밖으로 흘려듣는 것 같으므로 더 말하지 않았다.
읍에까지 오니 마침 오늘 미군의 입성이 있다 해서 어수선하고 개교식도 오후로 물리겠다 하므로
1. 학교의 체면으로 보아 자미없고
2. 생도들에게의 영향도 좋지 못할 것이고
3. 오전의 입성이 만일 오후로 연기되면 개교식은 어찌하느냐
등의 이유로 정각 거식(擧式)을 종용하였다.
학교로 가는 길에 식산은행의 지점장 대리와 금융조합의 부이사를 찾아보았다.
개교식은 예정대로 오전 10시에 개회.
개회사를 하라고 하기에
“이 여학교 개교식은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 하면 조선의 최근세사에 있어서 정치적인 큰 움직임이 있었을 때마다 반드시 그 뒤에 교육열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갑오경장에 따른 갑오-을미의 향학열과 기미년 독립운동에 뒤이은 기미-경신의 향학열이 그것이다. 이번 이 역사적인 독립 성취에 따라 또한 교육열이 팽창해 올 것이다. 이 당래할 이즈음 교육열의 선구로 그 첫 봉화를 든 것이 원주의 신명[해설 : “명신”이라고 두 차례 씀]여학교라고 나는 본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신명여학교의 개교식은 조선의 교육사상에 한 금을 긋는 중대한 의의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후 차로 오다 보니 만주서부터 귀환하는 동포의 정경이 하도 참혹해서 그 구휼사업에 손을 대 볼까 하고 공상(空想)을 그리다.
9월 22일 흐렸다 개였다 밤에는 비 [구휼사업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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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 직원들에게 재외 이재(罹災)동포 구휼사업이 어떨까 하고 자문했더니 모두 좋다고 찬성이므로 곧 오늘부터 착수하기로 결정.
지방 식량 사정으로 보아 주먹밥은 할 수 없고 옥수수로 할까 했더니 서악영 군의 의견을 좇아서 감자로 하기로 일결.
조합에 온 몇몇 지방 유지에게 말했더니 모두 극구 찬동, 즉일로 감자 십여 가마니와 돈 5백여원의 희사가 있어서 예상 이상의 대성공.
나는 이 사업의 의의를 물론 불쌍한 이재동포의 구휼에 두지만 그와 동시에 이를 계기로 하여 우리들의 가슴에 동포애의 정신을 환기해 볼까 한다. 우리가 독립이 되어서 그저 좋다기보다도 우선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조그만 일이라도 해보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하고. 우리들의 가두 진출에의 좋은 경험도 쌓게 되고.
서악영군의 주선으로 보례학당서 응원대 출동하기로 되어 더욱 마음 든든하다.
감자는 이웃 구(具)씨 집에서 매일 삶기로 하고.
실지로 해보니 먹는 사람보다도 먹지 아니하는 일반 승객으로부터 절찬이 있었다. 수많은 승객에게 한동안 동족애의 감격의 선풍을 일으키는 건 이 또한 절대한 수확이다.
낮에는 조합장 댁에서 초연(招宴).
제천조합서 특사가 와서 25일의 경성 대표대회(조금련)에 출석해 달라고 오송(五松)조합 조병순(趙炳純)씨로부터 전화로 요청이 있었다기 가겠다고 승낙.
9월 23일 개고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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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포도넝쿨을 정리.
오전 중엔 미군이 충주로 해서 이곳 경유, 제천 간다고 해서 어수선.
일기 정리하다.
구휼사업의 제2일 원만히 마침.
김연선(金連善)의 집에서 초연.
9월 24일 개고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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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귀환동포 구휼금품 이르다.
이항재(李恒載)씨로부터 송이 한 두룸.
5~6년 여자반에 포은 선생의 단심가와 송이(松伊)의 솔이란 시조를 가르치다. 다만 송이의 시를 진이(眞伊)의 것이라 잘못 가르치고 나서 아내에게서 듣고 비로소 깨달았다. 남에게 무얼 가르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스레 느꼈다.
오후 차로 상경.
아홉 시 가까이 청량리에 내렸으나 전차는 없고 미군정 당국 열 시 이후의 시내 통행을 금지한다 하므로 속보로 가서 혜화정 163-16 이철(李哲)에게 유숙.
[보유(補遺)] 오전 중 청년대와 학교 아동 전반에게 피 뽑고 논두렁 풀 베라고 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