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의 코

2025-02-20

입을 벌리면 하늘에서 흩어지던 싸락눈이 혀에 닿는다. 닿자마자 사라진다. 하늘 조각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구나. 입술을 뗀 채로 미숙은 눈밭을 뛰어다닌다.

미숙은 여섯 살이다. 흘러내리는 콧물을 몇 방울 삼키며 그게 눈 맛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새빨간 모자를 쓰고 있어서 그렇지, 그의 귀는 홍시만큼 붉고 차다. 상관없다는 듯 눈사람의 코를 만들고 있다. 코가 계속 떨어져 나가는 게 속상하다.

시간이 흘러 미숙은 잘 다린 옥스퍼드 셔츠 위에 코트 입은 친구와 걷고 있다. 코가 떨어질 듯 공기가 차다. 두 사람은 팔 하나만큼 적당히 먼 채로 캠퍼스를 걷고 있다. 하늘이 열린 것처럼 눈이 쏟아진다. 옆에 걷는 친구와 연애할 생각은 없지만, 미숙은 자기 우산을 펼쳐 나눠 쓰자고 한다. 우산이 작아 어깨와 어깨가 부딪친다. 사내의 체취가 조금 나는 것도 같다. 팔꿈치가 닿는 그 조그만 원에는 둘뿐이다. 걷는 동안 미숙은 24살이다. 우산을 나눠 쓴 사내는 어느 날 미숙에게 반지를 주었다.

흰머리가 나기 시작할 즈음 미숙은 봄이 좋아졌다. 겨울엔 너무 추워서 말도 얼어붙는다. 외출을 삼가며 다음 절기를 기다린다. 둘이기 때문에 괜찮다.

미숙은 삶을 미리 준비하는 편이다. 차곡차곡 다음 시절에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을 만들고 간절히 기도도 한다.

하늘이 닫히면 새순이 움트기 시작할 거다. 진갈색 껍질을 뚫고 산수유는 온갖 연두를 갖게 될 거다. 곧 나무들이 일제히 데뷔를 준비한다. 그 예감을 확신할 만큼 미숙은 이 눈밭을 오래 지켜봐 왔다.

우산을 나눠 썼던 사내는 지금은 모자를 쓰고 다닌다. 머리가 유독 찬 계절이다. 그는 오래도록 미숙을 좋아했고 그 겨울을 다르게 기억한다. 만약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미숙과 그날 캠퍼스를 걷지 않았다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을 거다. 왼쪽으로 살짝 휜 그의 코를 닮은 사람이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다. 그 사람이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했을 거다.

눈이 그치길 기다리다가 잠들었다. 풍경이 모두 가라앉은 뒤에야 간밤에 어떤 눈이 왔는지 알게 된다.

환갑이 넘은 미숙이 공원을 걷는다. 머리가 새하얘진, 모자를 쓴 사내와 함께다. 발목만큼 쌓인 눈을 손으로 얇게 빚어 눈사람에게 코를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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