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화장대를 염탐하며 새빨간 루주를 바르던 사춘기 딸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했다. 하지만 요즘 10대들의 화장은 소소한 호기심에서 끝나지 않는다.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이 더 예쁠 때’라는 말로 설득하기에 이들의 화장은 대담하고 주체적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화장이란 무엇일까. 규제와 수용, 딜레마에 빠진 부모들을 위한 지침도 더했다.
초5 딸이 화장을 시작했다
“톤업크림을 바르는 순간 ‘보정 필터’를 씌운 듯 예뻐지는데 이걸 어떻게 거부하겠어요.” 이서율양(12)은 매일 아침 화장을 한다. 눈과 입술, 볼 터치까지 꼼꼼하게 챙기지만 “과하지 않은 정도”라고 했다. 아이라인을 그리거나 쌍꺼풀 테이프를 붙이고 있는 친구들과 비교해서다.
천안녹색소비자연대가 지난 6월부터 9월까지 여성 청소년 7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화장 경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4.8%가 ‘중학교 입학 후’ 색조 화장을 시작했다고 답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선택한 31.6%의 응답자까지 합산하면 85%를 넘는 수치다.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 수치는 이보다 크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이현주 교사(가명)는 “고학년의 경우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화장한다”며 “티를 많이 내느냐, 내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 교사는 “소셜미디어 등의 영향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중요한 세대라 자기 과시, 특히 외모에 관한 관심이 두드러지다 보니 화장도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유튜브에 ‘초등학생 메이크업’을 검색하면 ‘등굣길 10분 메이크업’ ‘16년생 메이크업’ ‘엄마도 모르는 화장법’ 등 관련 영상이 쏟아진다. 조회수도 높은 편이다. 4년 전 처음 화장을 시작한 중학생 오은서양(15)은 또래 크리에이터들의 영상을 보며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이후 직접 화장을 하면서 화장품을 사 모았다고 했다.
여기에 ‘초통령’으로 불리는 아이브 장원영, 뉴진스 민지 등 아이돌그룹 멤버들의 화려한 모습은 이들을 닮고 싶어하는 알파세대의 욕구를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강아름 청소년 심리분석가는 “요즘 10대에게 화장은 단순한 미용이 아니다”라며 “빠르게 확산하는 트렌드를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단이자 자신의 개성과 존재감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분석했다.
용돈 받으면 화장품부터 사러 가요
아이들이 화장에 입문하는 패턴은 비슷하다. 시작은 틴트나 립글로스다. 입술 색이 진해지는 것에 만족도가 떨어지면 그다음은 피부색을 조정하는 톤업크림이나 비비크림 차례다. 이때 포인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다. 손재주가 남다른 아이들은 아이라인이나 아이섀도에 도전하기도 한다.
어린 자녀의 화장을 환영하는 부모가 많지 않다 보니 아이들이 주로 정보를 얻는 창구는 또래 집단이나 인터넷이다. 해외의 경우 틱톡이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자신만의 ‘피부 관리법’이나 ‘노화 방지법’을 공유하는 10대들이 인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화장은 친구들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도구이자 놀이로 자리매김했다. 강이라양(13)은 “친구들이 모두 화장을 하고 다니는데 나만 하지 않는다면 유행에 뒤처지는 기분이 들고 불안할 것 같다”며 “화장품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화장 비결을 알려주면서 친해진다”고 전했다.
화장을 향한 관심과 열정에 비해 소비는 다소 제한적이고 소극적이다. ‘청소년들의 화장품 구매 행동과 사용실태에 관한 연구(성신여대 뷰티산업학과 백지연, 2023)’에 따르면 10대들의 월평균 화장품 구매 비용은 평균 1만~2만원 미만이다.
반면 ‘직접 화장품을 구매하는 학생’은 61.6%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가성비’를 강조한 다이소나 접근성이 높은 올리브영과 같은 드러그스토어가 ‘뷰티 방앗간’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는 이유다. ‘내돈내산 리뷰’ 등 이곳에서 판매하는 제품을 활용해 따라 할 수 있는 온라인 팁이 무궁무진하다는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에는 온라인 시장을 찾는 10대들도 늘어나는 분위기다. 카카오스타일이 운영하는 스타일 커머스 플랫폼 지그재그는 지난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 누적된 10대 고객의 화장품 구매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83%나 급증했다고 발표했다.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된 교육을
10대들의 화장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은 양가적이다. 두 딸을 둔 아빠 하성훈씨는 “탈코르셋 운동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날 선 반응을 보였다. 화장품 회사들이 어린이를 고객으로 보고 마케팅을 펼치면서 화장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남매맘’ 조유진씨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조씨는 “아이가 어른처럼 꾸미는 ‘어덜키즈’ 문화가 확산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이 외모지상주의나 ‘예뻐지려면 화장을 해야 한다’와 같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힐까 우려된다”며 “민낯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개성 있는 얼굴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문제는 널리 퍼진 화장 문화와 달리 안전성에 대한 인식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화장품에 함유된 화학물질은 피부에 따라 악영향을 줄 수 있고 장시간 사용하거나 잘못 쓸 경우 피부 트러블을 유발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천안녹색소비자연대의 자료에 따르면 여성 청소년 응답자 71.5%가 ‘시중에 판매되는 것이니 믿고 사용한다’고 답했다. 또한 절반이 넘는 52%가 색조화장품 구매 시 첫 번째 선택 기준으로 ‘색상’을 꼽았다. ‘성분’은 18%에 불과했다.
이선영 피부과 전문의는 “화장품에 들어가는 화학 방부제가 여성호르몬 분비를 촉진해 성조숙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며 “화장품 제조에 사용되는 원료와 허용량은 어른 기준이므로 아이들의 흡수율은 어른보다 높아 같은 양을 발라도 독성의 위험이 크다”고 경고했다.
더욱이 유해성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뷰티 애플리케이션 ‘화해’는 알고 있지만 각 성분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숙지하는 아이들은 드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에 따라 절대적 반대보다는 현실적인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 모양새다.
중학생 딸을 키우는 주부 정지혜씨는 “아이의 화장을 환영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라며 “듣지도 보지도 못한 브랜드의 화장품을 사용하는 아이를 보면서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해 허락하게 됐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이자 경기도의 한 중학교에 근무하는 조미연 교사(가명) 역시 “네일 케어, 마스크팩, 화장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키즈카페를 비롯해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화장에 노출된 아이들”이라며 “일방적인 반대가 얼마나 유효할까”라고 반문했다. 또한 그는 “요즘에는 모범생들도 화장을 많이 한다”며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화장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고 전했다. “무조건 제재하기보다는 인증받은 화장품을 고르는 법, 잘 지우는 법 등을 가르쳐주는 것이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어떤 화장품을 선택해야 할까
10대들의 화장품을 고를 때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안전성’이다. 안진정 세명대 뷰티케어학과 교수는 “화장품을 사기 전에는 저자극 성분인지 확인하고 피부 자극 테스트를 받았는지 여부, 안전성 테스트를 완료한 제품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유통 경로가 불확실한 제품 역시 의심해야 한다.
화장을 시작한 아이라면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배포한 ‘소중한 내 피부를 위한 똑똑한 화장품 사용법’과 ‘화장품 안전 사용 교육 자료’를 참고해봐도 좋겠다. 눈과 입술에 바르는 화장품은 친구와 같이 써서는 안 된다거나 퍼프나 아이섀도 브러시 같은 화장도구들은 중성세제로 세탁해 완전히 말린 뒤에 써야 하는 등의 사용 원칙과 제품 정보를 확인하는 방법, 부작용 발생 시 대처 방법, 온라인에서 화장품 구매 시 주의 사항 등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