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취재|보수 재건 밑거름 ‘국민의힘 혁신 보고서’ 누가 뭉갰나
외부 의뢰해 받은 혁신안, 사무처 회전문 카르텔 깰 개편안 담아
“뭐 하러 한 거야!” 떨떠름 반응…당 지도부 교체 후 사장(死藏)
2024년 12월 3일 낮,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대표는 한 행사장에서 “총선 패배 이후 공들여온 당 조직 혁신이 곧 마무리되니 내년(2025년)에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대외적으로 언급을 자제해온 나름의 깜짝 발표였다. 그날 밤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전까지 한 대표의 발표는 그날의 가장 큰 정치 이슈였다.
22대 총선 직후 한동훈 지도부는 당 조직 혁신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경직되고 노후화된 체질로는 앞으로의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을 절대 이길 수 없겠다는 ‘위기의식’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치러진 22대 총선은 국민의힘이 얼마나 총체적 난국 상황인지 여실히 드러난 선거였다. 이렇다 할 비전도, 정책도 없이 선거를 치렀다. 그렇다고 공천자들의 면면이 신선한 것도 아니었다. 선거의 당락을 좌우하는 3요소인 인물, 구도, 바람 중 국민의힘이 내세울 건 하나도 없었다. 국민의힘은 대수술이 불가피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계엄 선포 후 후순위로 밀린 혁신
한동훈 지도부가 혁신의 첫 단추로 지목한 건 보수의 싱크탱크, ‘한국의 헤리티지재단’이라고 불리는 여의도연구원(여연)과 당 사무처였다. 전문 컨설팅 업체를 통해 조직을 진단할 생각이었다. 그해 8월 글로벌 인적자원관리 컨설팅 전문업체인 머서코리아를 낙점했다. 당시 업체 선정에 관여했던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많은 인사 전문가를 보유해 전문성과 노하우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한동훈 지도부가 콕 집은 당 사무처와 여연은 관료화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국민의힘 전신)이 1991년 실시한 중앙사무처 1기 공채를 시작으로 마지막 공채였던 2023년 22기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직은 비대해지고 노쇠했다. 내부에선 이를 22대 총선 대패의 중대한 원인으로 지목했다. 선거 기간 의욕 없는 당 사무처 직원과 제대로 된 정책 공약을 내놓지 못하는 여연에 대한 성토가 들끓었다. 여연이 일부 지역에서 여론조사조차 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한 한동훈 지도부가 ‘선거에서 이기는 조직’을 기치로 대대적인 조직 혁신에 나선 것이다. 머서코리아는 국민의힘 당사에 상주하면서 당직자들을 면접하는 등 두 달에 걸친 조사를 벌여 지난해 10월 중간보고서를 제출했다. 이어 12월 중순 최종 조직 혁신안을 만들었다. 당 지도부는 보고서를 바탕으로 2025년 1월 조직을 개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최종 보고서가 나오기 직전인 12월 3일 한동훈 대표가 공개적으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자신만만해한 배경이다. 국민의힘은 2월 말~3월 초 당무감사를 실시해 부실 당협을 솎아내고 성적이 낮은 당협위원장을 교체하는 혁신 플랜을 준비했다. 당시 친윤계 사이에서 “친한계가 우리를 솎아내 당을 장악하려고 한다”라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로 고강도 인적 쇄신안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12·3 비상계엄 선포로 당의 혁신 시계는 멈췄다. 비상계엄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한동훈 지도부가 물러났고, 12월 중순 쌍권(권성동·권영세) 지도부가 들어섰다. 알려진 대로 쌍권 지도부는 ‘언더 찐윤’에 힘을 실어줬다. 당내 소장파가 “과감한 혁신을 통해 계엄의 강을 건너자”라고 외쳤지만, 철저히 묵살됐다. 언더 찐윤의 존재를 처음 세상에 알린 김상욱 의원은 “이들이 원하는 것은 기득권 유지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한동훈 지도부가 추인한 ‘조직 혁신안’도 내용 보강 등을 이유로 지연되다가 지난 3월경 쌍권 지도부에 보고됐다. 당시 보고에 참석했던 이들은 지도부 첫 반응이 “이거 뭐 하러 한 거야”였다고 전했다. 혁신안 전체를 본 것도 아니고 요약본만 슥 훑어보고는 “별 내용 없네”라는 반응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더는 비대위에서 언급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당비 수천만원을 들여 7개월에 걸쳐 만든 혁신안이었지만, 제대로 된 논의 과정 없이 곧장 캐비닛으로 들어가고 만 것이다.

비대위 보고됐지만, “이거 뭐 하러 한 거야”
의문은 꼬리를 문다. 혁신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기에 지도부가 시큰둥했던 걸까. 취재를 종합하면 보고서 내용은 크게 ‘전략기획국 신설’, ‘사무처 조직 쇄신’이다. 당에 산재해 있는 전략 파트를 하나로 묶어 당의 장기 로드맵을 짜는 컨트롤타워인 전략기획국을 신설하고, 당 사무처의 재채용 카르텔을 개혁한다는 것이다.
당시 재채용 카르텔은 국민의힘의 고질적인 병폐로 꼽혔다. 지방선거 등에 출마하기 위해 그만둔 사무처 직원이 낙선한 뒤 다시 사무처에 채용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탄탄한 기수 문화가 바탕에 있었다. 이 때문에 젊고 유능한 인재를 대거 채용하고 싶어도 예산이 없어 뽑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여연을 포함해 당의 연구 전문성이 떨어지는 문제도 재채용 카르텔과 깊이 관련돼 있다.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고 빈자리를 찾아주는 식이어서 갈수록 당직자들의 실력은 곤두박질쳤다. 익명을 원한 당 관계자의 설명이다.
“국민의힘 공채로 뽑힌 ‘순혈 당직자’는 그야말로 철밥통이다. 빈자리가 있으면 선거에서 떨어진 선배를 ‘구제’하는 용도로 내어준다. 그러니 농업 전문가가 갑자기 국회 과방위 전문위원이 되는 촌극이 벌어진다. 보좌관들이 현안을 질문하면 ‘모른다’고 하는 전문위원들이 매우 많다. 국회의원들이 보좌진은 우습게 보면서 사무처 당직자를 높이 대우하는 문제도 이러한 카르텔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고학력 인재들이 민주당에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사무처 혁신을 늦춘다면 우리 당이 진짜 민주당을 따라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를 수 있다. 당 지도부는 이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여연의 전문성 하락도 사무처 관료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정당법상 정당의 정책연구소(연구원)는 경상보조금의 30% 이상을 정책 연구 및 개발에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문제는 국민의힘은 당대표가 바뀔 때마다 전문성과 상관없이 자기 사람을 여연 연구원으로 채용하는데, 이 예산이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 당대표 때 채용된 연구원과 새 대표가 채용한 연구원이 혼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이렇다 보니 본래의 정책 기능은 사라지고 몸집만 커져 예산의 상당 부분을 인건비에 쓰고 있는 실정이다.
당에서도 이 문제에 공감하는 의원들이 적잖다.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은 “당의 고질적 문제”라며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력 구조 개편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노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했다.

“친윤계, 혁신의 ‘ㅎ’자도 못 꺼내게 해”
혁신 보고서의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람은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극소수다. 당시 지도부는 보고서의 혁신안을 이행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항변한다. 비상계엄 선포와 이후 전개된 탄핵 정국에서 혁신을 얘기할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거다. 권영세 전 비대위원장은 “그때는 우리 당 조직을 어떻게 개편해야 할지를 논의할 정도로 한가할 때가 아니었다”라며 “(윤 전 대통령을) 체포한다고 해서 정신없을 때였고, 당장 대선을 준비하는 것이 급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당의 변화를 요구했던 의원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친윤 주류에 대한 책임론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혁신 보고서가 담은 인적 쇄신안을 지도부가 불편하게 생각했을 거란 주장이다. 김상욱 의원은 “그때는 뭐라도 변화하는 모습을 국민께 보여드려야 하는 상황임에도 혁신의 ‘ㅎ’자도 꺼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라며 “만약 의원총회에서 (혁신 보고서) 내용을 공유하는 등 뭔가 바꾸려고 시도했더라면 국민의힘이 적어도 이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당이 변화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민의힘은 혁신안을 보고 받은 지난 3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시·도당 및 당원협의회 주요당직자 연수를 개최했다. 쌍권 지도부와 주요 인사, 당원 800여 명이 참석해 당의 비전과 정책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당의 미래 계획을 알리고 의견을 구하기에 최적의 상황이었지만, 이날 행사는 권성동 당시 원내대표를 비롯한 몇몇 지도부의 현안 관련 특강만 진행됐다. 갓 나온 혁신안에 대한 소개나 토론은 없었다.

국민의힘은 8·22 전당대회를 통해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한다. 한국갤럽이 지난 12~14일 전국 만 18세 이상 국민 1007명을 대상으로 조사하고 15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힘 지지층의 46%가 김문수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어 장동혁 후보 21%, 안철수·조경태 후보 각 9%로 나타났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 전당대회 본경선은 당원 80%, 일반국민 20%를 통해 결정되기 때문에 김문수 후보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다.
과연 ‘반탄파’ 김문수 등새 지도부는 ‘혁신’과 ‘안정’ 중 어떤 결정을 내릴까. 새 지도부는 과연 캐비닛에 잠들어 있는 혁신 보고서를 꺼내 볼까. 취재 말미, 권영세 전 비대위원장은 심드렁하게 툭 내뱉었다. “그것(혁신보고서)을 참조할지 말지는 새 지도부가 결정하겠죠.”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choi.hyunm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