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지정학적 흐름이 급변하고 있다. 적수 없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선두 TSMC를 보유한 대만이 트럼프의 더 강력해진 ‘미국 우선주의’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TSMC와 대만의 선택에 따라 삼성 파운드리의 전략도 변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쳉웬 대만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 주임위원(장관)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대만 현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TSMC의 2나노미터(㎚·1㎚=10억 분의 1m) 공정이 민주주의 우방 국가로 확산될 것인지 논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TSMC의 최첨단 2나노 반도체 공정이 대만 밖 미국에서도 이뤄질 가능성을 대만 정부 관계자가 직접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TSMC는 그동안 2나노 칩은 대만에서만 생산하겠다는 입장이었고, 실제 내년부터 양산을 시작한다.
트럼프 앞에서 ‘N-1’ 원칙마저 흔들리는 대만
우 주임위원의 발언에 대만 산업계는 동요하는 분위기다. 앞서 궈즈후이 대만 경제부 장관이 “대만에는 자국 기술 보호를 위한 규정이 있기 때문에 TSMC는 해외에서 2나노 칩을 생산할 수 없을 것”이라 강조한 지 채 한 달도 안 돼 기류가 뒤집혔기 때문이다. 다만 우 주임위원은 반도체 기술 공동화(空洞化)를 우려하는 일각의 우려에 “2나노 공정의 안정적인 대량생산을 확인한 뒤에 외부로 이전하는 것을 고려할 것”이라며 “N-1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최근 대만 반도체 업계에선 ‘N-1 원칙’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N-1 원칙은 대만 내 반도체 공정 수준이 해외 공장보다 1나노 이상 앞서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대만 정부가 주도하는 ‘기술시차’ 원칙이다. 전 세계 반도체 핵심 공급망으로 떠오른 TSMC를 지렛대 삼아 자국의 안보를 지키고 기정학적 가치를 높이려는 대만의 고육지책인 셈이다.
트럼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안 통한다
트럼프 당선인은 취임 전부터 “대만이 미국의 반도체 사업을 모조리 훔쳐갔다”면서 방위비로 대만을 압박했다. 그런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다음달 20일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대만의 N-1 원칙도 흔들리는 분위기다.
TSMC는 650억 달러(약 90조원)를 들여 미국 애리조나 주에 반도체 공장 3개를 짓고 있는데, 당장 2028년 가동되는 공장에서는 2나노급 공정이 적용될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대만 TSMC 공장과 미국 TSMC 공장 간 기술시차가 갈수록 줄고 있다”면서 “5년 후면 최첨단 칩 생산에 있어 미국 공장 비중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 말했다.
‘추격자’ 삼성도 美에서 2나노
현재 전열을 재정비 중인 삼성전자 역시 전략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삼성은 미국 텍사스 테일러 파운드리 신(新)공장에서 당초 올해 말부터 4나노 공정으로 칩을 생산할 계획이었으나 수주 부진과 실적 악화가 겹치며 일정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TSMC가 조기에 2나노 공정을 미국 공장으로 옮긴다면 삼성 역시 고객사 유치를 위해 테일러 공장을 2나노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본다. 삼성전자는 테일러 공장의 가동 시점을 미루는 동시에 2나노 공정 설비를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TSMC와 발맞춰 2025년 2나노 양산, 2027년 1.4나노 양산을 계획하고 있다. 지난주 한진만 반도체(DS)부문 미주총괄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 임명하며 사령탑을 교체한 삼성 파운드리는 내년 상반기 화성사업장에서 본격적인 2나노 양산 테스트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