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실의 마지막 숨통

2025-02-12

1389년 겨울. 이성계, 정몽주 등 아홉 명의 대신이 공양왕을 세우기로 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이 좀 미덥진 않아도 크게 거슬리는 짓은 안 할 것이라고. 그는 우유부단하고 재물 불리는 데나 관심이 있다는 것이 중평이라 임금감이 아니라는 반대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래서 더 적임자였을 수도 있다. 왕실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라는 명분에, 이성계의 사돈 집안이라는 숨은 배경까지 더했으니 이 정도면 안심할 만했다. 자신들의 개혁안을 지지해주면 더할 나위 없고, 아니더라도 허수아비 노릇만 해줘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의 계획이 틀어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공양왕은 개혁세력이 원한 구세력에 대한 탄핵을 거부하거나 최소화하고, 자기 정치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본격적인 신호는 한양 순주와 개경의 사찰 연복사 중창이었다. ‘순주’는 돌아가면서 머문다는 뜻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의미의 ‘천도’와는 다르다. 개경은 그대로 수도로 두되, 서경(평양)이나 남경(한양)처럼 풍수가 좋은 곳에 국왕이 몇개월 머물면 왕업이 흥성해질 것이라는 예언적 기대가 순주다. 한편 연복사에는 이 무렵 세 곳의 연못과 아홉 곳의 우물을 파면 왕업이 흥성한다는 예언이 유행했다. 이 두 가지 모두 고려시대 반인반신으로 추앙받은 태조 왕건과 관련이 깊었는데, 공양왕은 위대한 태조를 본받는 정치를 한다고 표방한 것이다. 고려식 유훈정치라고나 할까.

당대의 의식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들을 주술적이고 허탄하다고 생각했다. 명나라와 왜구 문제, 토지개혁, 규율과 윤리의 타락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거늘 사찰이나 짓고 국왕이 한양이나 다녀오면 왕업이 흥성한단 말인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화려한 국왕의 순주 행렬과 도성의 아름다운 사찰에 감동받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았다. 영웅의 서사와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의 풍경에 안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공양왕은 한 가지 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우왕과 창왕을 연이어 폐위시킨 이들이 자신까지 또 폐위시키기는 부담스럽지 않을까? 한양 순주를 반대하는 간관에게 “송도는 군신이 폐하는 땅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느냐”고 윽박지르는 광경은 바로 이 공양왕의 카드를 보여준다. 여기에, 시대적 대의가 아니라 왕실에 충성하기로 마음먹은 정몽주는 천군만마 같았을 것이다.

비판적 분위기 속에서도 한양 순주는 어떻게 마무리됐으나 가뭄에도 계속된 연복사 공사는 새로운 비판을 불러왔다. 처음의 비판론은 그렇게 과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와 공양왕을 옹호하며 비판자들을 극렬히 비난하는 친위 상소가 올라오자 사태가 격해졌다. 이제 비판은 행위의 표면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퇴행적 행위의 근원이 태조에 기댄 유훈정치에 있다는 것이 명약관화해진 상황에서 관료들은 이제 태조 왕건 자체를 타격하기 시작했다. 태조는 본받을 만한 진정한 선왕도 아니며, 순주나 사찰 같은 것은 진정한 선왕의 길도 아니라는 비난이었다. 이제껏 고려 왕조의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 태조 왕건이라는 성역이 비판받는 데 이른 것이다.

결국 공양왕을 끝으로 고려의 왕업은 종말을 맞이했다. 차라리 허수아비로 있었다면 고려 왕실은 지속됐을 것이다. 470여년이라는 시간과 서사가 쌓은 전통적 권위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업의 중흥을 꾀한다던 그의 온갖 시도는 도리어 지속불가능성을 증명하며, 사람들의 마지막 기대를 저버렸다. 이후 변변한 고려 왕실 부흥운동 한 번 일어나지 않은 것은 한 톨의 미련도 사라진, 차가운 민심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왕조의 창업자를 욕보인 것, 고려 왕실의 마지막 숨통을 끊은 것, 이 모두는 공양왕 그 자신이었다. 원래 권력과 권위는 그렇게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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