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달 기록적인 호우가 쏟아졌다. 닷새 가까이 이어진 폭우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침수와 도로 유실, 산사태가 잇따르면서 국민 불안도 커져갔다. 비는 그쳤지만, 장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수천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재산 피해가 집계됐다. 피해 지역의 많은 주민은 아직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최근 몇 해간 되풀이된 집중 호우는 더 이상 예외적인 현상이 아닌 기후 위기에 따른 환경 변화로 봐야한다. 재난 양상은 더 크고, 예측하기 어려운 형태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자연 재난은 건물이나 도로 붕괴와 같은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재난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trauma)'를 겪게 만든다. 재난 경험자는 재난에 압도돼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느끼며, 갑작스럽게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은 상실감과 불안을 겪는다. 또 불면이나 극심한 피로와 같은 신체적 증상과 함께 분노나 죄책감과 같은 심리적 고통을 호소한다. 더 나아가 삶의 의미를 잃거나 세상에 대한 신뢰마저 흔들릴 수 있다.
이러한 심리적 반응으로부터 상당수 사람은 골든타임 내 심리적 응급처치(PFA)를 포함한 적절한 도움, 가족과 주변의 사회적 지지로 그 충격과 고통으로부터 회복한다. 그러나 일부는 회복이 느리거나 트라우마가 만성화될 수 있다. 심지어 직후에는 없었던 정신적 문제가 뒤늦게 발생하기도 한다. 심리적 반응이 장기화되고 일상생활로의 복귀에 지장을 줄 경우에는 트라우마 회복을 위한 전문적 심리지원이 필요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재난 트라우마 회복 심리지원서비스'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됐다. 당시 처음으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통합심리지원단이 생존자, 유가족,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심리지원을 시행했다.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의 심리위기지원단이 모태가 되어 2018년에 '국가트라우마센터'가 설치됐다. 이후 2020년 초 시작된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는 전국 단위 '코로나19 통합심리지원단'을 구성하고, 일상 회복을 위한 마음건강 지침을 개발하면서 재난 심리지원 체계가 본격 구축됐다.다.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의 심리위기지원단이 모태가 되어 2018년에 '국가트라우마센터'가 설치됐다. 이후 2020년 초 시작된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는 전국 단위 '코로나19 통합심리지원단'을 구성하고, 일상 회복을 위한 마음건강 지침을 개발하면서 재난 심리지원 체계가 본격 구축됐다.
2021년 전국 5개(수도권·충청권·호남권·영남권·강원권) 권역에 트라우마센터가 설치된 이후, 대규모 재난이 발생하는 경우 국가트라우마센터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게 된다. 이들 권역별 트라우마센터가 주축이 되어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 전문요원과 함께 재난 심리지원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여객기 참사 유가족에게는 3000여건의 심리지원, 트라우마 안심 클리닉, 매주 토요일 유가족 치유데이를 제공했다. 올해 상반기 영남권 대형 산불 이재민에게는 임시주택을 찾아가는 심리지원, 소방관 등 현장대응인력 소진프로그램 운영으로 회복을 돕고 있다.
회복을 돕는 과정에서 획일적인 접근보다는 전문성을 기반으로 재난 피해자에 맞춰 다각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우울증, 불안장애 등 보다 전문적 개입이 필요한 경우 전문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기관과의 연계를 지원한다. 재난 피해로 느꼈던 무력감을 당사자가 함께 극복하기 위한 집단 상담, 상실감과 함께 찾아오는 복합적인 감정들을 해소하기 위한 공감 기반 프로그램 등 재난 피해자의 심리적 특성을 고려해 세심하게 접근하고 있다.
이전까지 풍수해 등 자연 재난에서 주로 재산 피해 복구에 자원이 집중됐다면, 2017년 포항 지진과 2019년 강원 산불 등을 계기로 심리지원이 재해 구호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인식이 커졌다. 이번 폭우로 수해를 입은 지역에서는 권역 트라우마센터와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 전문요원들이 피해 지역을 방문해 재난 경험자들을 만나고, 재난 직후에 도움이 되는 심리 안정 기법들을 안내하며 심리적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는 고위험군을 선별해 지속적인 상담이나 치료로 연계하고 있다.
재난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지만, 준비된 사회일수록 그 충격에서 더 잘 회복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대규모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재난 트라우마 회복 심리지원 체계를 지속 보완·발전시켜 나가고,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물론 정신건강 전문가, 민간 심리지원기관 등 다양한 주체와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복지부는 우선 트라우마센터의 대응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전문 인력을 보강하고 예산을 확충할 계획이다. 더불어 전담인력 교육과 콘텐츠 개발로 재난 심리지원 전문성을 제고해 나가겠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는 실체로서 트라우마를 겪는 참사 유가족·피해자를 위해 참사별로 매뉴얼을 정비해서 심리지원서비스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하고, 장기 추적 관찰로 지속적인 회복을 지원하겠다.
기후 위기 시대에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재난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재난으로 인한 정신건강 문제는 특정 지역이나 전문가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안녕과 직결된 사안이다. 재난 이후 심리지원은 단순히 개인의 회복을 돕는 것을 넘어, 지역 공동체와 사회 전체의 회복력을 키우는 필수적인 과제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재난 일선 현장을 지켜온 5개 트라우마센터와 전국 정신건강복지센터 전문요원의 헌신과 수고에 감사를 드린다. 트라우마 회복 심리지원의 핵심 가치가 잘 드러나는 심민영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의 저서 '트라우마 해방일지'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우리 서로에게 조금만 더 다정하게 해 주면 안 될까요?”라는 말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트라우마 회복은 당사자들이 이루어냅니다. 회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당사자에게 트라우마는 '지나간 기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는 실체다.” “재난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재난 당사자를 둘러싼 주변의 반응은 우리의 몫이다. 대단한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따뜻한 환영, 진심 어린 위로, 현실의 짐을 덜어주는 작은 손길로 충분하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1965년 출생으로 전남여고와 서울대 의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보건학 석사, 예방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국립보건원 연구관 특채로 공직에 입문했다. 복지부 보건산업기술과장·응급의료과장, 질병관리본부 만성질환관리과장·질병예방센터장·긴급상황센터장 등을 거쳤다. 2015년에는 복지부 질병관리본부장으로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대응을 이끌었다. 2020년 질병관리청 초대 청장으로서 약 1년 반 동안 코로나19 방역을 진두지휘했다. 이후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임상교수로 활동한 후 이재명 정부 초대 복지부 장관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