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갑의 난독일기] 흘러야 산다

2024-10-27

흐르는 것은 죄다 길이 있다. 흘러야 길이다. 물이 그렇고 숨이 그렇고 피가 그렇다. 바람도, 해와 달도 흐르는 길이 있다. 흐름은 길이 품고 태어난 숙명이다. 형체가 있든 없든, 만져지든 만질 수 없든, 흐르는 것들은 흐르는 것들끼리 길을 따라 흐른다. 흐르지 않는 것을 가리키며 길이라고 이름 붙인 게 있었던가. 나는 흐르지 않는 길과 마주친 적이 없다. 길이란 길은 흘러야 산다. 생명도 그와 같아서, 길을 따라 생명의 씨앗을 흘려보낸다. 뿌리를 내린 것들은 뿌리 아래서 물과 양분을 뽑아 올려 줄기와 이파리로 실어 나른다. 손과 코와 입을 가진 것들은 쥐고 맡고 뜯은 것을 씹어 삼켜 허파와 위와 심장과 뇌로 실어 나른다. 그렇게 실어 나른 숨결과 온기가 생명을 살려낸다. 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다.

막힌 것도 길일까? 묻는 건 어리석다. 막힘이라는 말 어디에도 흐름은 없다. 막힘이 길어지면 기필코 끊어지고 터진다. 그것이 길이 품은 고유의 성깔이다. 남과 북을 잇던 길도 끊어지고 말았다. 철길도 찻길도 끊어졌다. 땅으로 난 길이 그 지경인데 하늘길과 바닷길은 오죽할까. 꽉 막힌 길을 넘나드는 건 삐라와 오물 풍선뿐이다. 보내고 받는 건 반가움이라야 온당한데, 보내는 쪽도 받는 쪽도 민망하기가 그지없다. 아닌 말로, 남 부끄럽고 창피할 일이다. 마을과 마을도 아니고, 국가와 국가가 주고받는 것이 삐라와 오물 풍선이라니.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며 평양에 삐라를 뿌려대고, 서울에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고 있다니.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어라 할 것인가. 이러면서도 어른을 따라 배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 배워야 마땅할 옳은 짓이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꽉 막힌 ‘길’은 ‘질’을 낳는다. 질이 붙은 말치고 고약하지 않은 건 없다. 도둑질이 그렇고, 염장질이 그렇고, 노름질이 그렇고, 싸움질이 그렇다. 길이 끊어진 까닭도 알고 보면 뒤에서 꾸며대는 부채질 때문이다. 아닌 척, 모른 척, 하면서 꾸며대는 부채질은 몹쓸 정치 모리배의 특기다. 선거철이 닥치거나 지지율이 급락하면 어김없이 그 짓을 꾸민다. “국민 여러분, 전쟁이 터질지도 모릅니다.” 삐라 역시 다르지 않다. 남과 북의 문제로 확대하지 않고 동네와 동네의 문제로 좁혀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를테면, 초고층 펜트하우스에 사는 부자가 쪽방촌에 사는 가난한 이웃에게 삐라를 뿌렸는데, 그 내용이라는 게 “밥이나 먹고 사니?” “우리 동네 쓰레기통에는 트지도 않은 통조림이 넘쳐난다.”라며 자랑질하는 것이랄까.

그런 게 바로 부채질이다. 화를 돋워서 결국 싸움질을 유도하는 것. 진심으로 우러난 마음에서 도움을 주려는 사람은 요란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선행이 드러날까 되려 감추고 또 감춘다. 그래서 묻고 싶어진다. 카메라까지 대동하고 시끌벅적 삐라를 뿌려대는 사람은 정작 준비가 되어 있는지. 북한 동포는 고사하고, 펜트하우스의 담을 넘어온 쪽방촌 이웃들에게 나눠줄 초고층 아파트는 마련해 두었는지. 같이 먹고 함께 입고 나눠 쓸 수 있는 여유자금은 준비해 두었는지. 새로운 곳에 적응하고 살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일하고 치료하고 요양하고 누릴 수 있는 예산과 정책은 세워두었는지. 덧붙여, 그렇게 해도 좋다는 펜트하우스 전체 주민의 동의는 얻었는지. 묻고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막히면 죽고 흘러야 산다.

틀림없다. 풀과 나무도, 사람과 사람이 사는 별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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