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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다. 정치는 허위와 비밀을 ‘정당하게’ 활용하며, 이로써 권력이 목적으로 했던 ‘더욱 고귀한 바’를 달성하면 그만이다. 진실은 취사 선택된다. 역사에는 거짓 선동을 반복함으로써 권력을 쟁취, 유지, 확대한 정치적 사례가 숱하게 많다.
선동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허위 정보, 고정관념, 폭력적 환상, 공포가 반복되며 정교화될 때 우리는 처음에는 거짓이라고 인식했던 메시지조차 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진실에 관심이 없다. 진실은 어렵고 드물다. 그러니 많은 경우 심지어 민주적 국가에서도, 권력자가 진실을 추구할 유인은 없다. 권력자에게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쉬운 수단이 얼마든지 있다.
권력이 진실 추구를 표방한다면 어떨까. 이는 성공하기 힘든 목표인데, 진실성을 판단하는 주체의 자율성을 통제하려는 열망을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진실과 허위를 판단하는 권력 앞에 진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물음에 권력은 필요에 따라 다른 답을 내놓기 십상이다.
언론은 진실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 이 또한 녹록하지 않다. 2016년 트럼프 선거본부를 이끌었고, 트럼프 정권의 백악관 수석 전략가를 지냈으며, 수백만 페이스북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이용하여 미국 대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의 부사장이었던 스티브 배넌은 2019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그저 ‘때리고, 때리고, 때리는 것’ 그렇게 하여 추진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상대는 미디어다. 그리고 미디어는 멍청하고 게을러서 한 번에 하나밖에 다루지 못한다. 우리는 홍수를 만들면 된다.”
유능한 언론에 성공이 보장된 것도 아니다. 언론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밝혀낸 언론에 경제적, 사회적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진실은 어렵고 드물다. 좋은 보도를 응원하지만, 좋은 보도를 진득하게 읽어내는 건 고역이다. 고백하건대, 진실은 나에게도 인기가 없다.
이렇듯 진실은 정치의 친구였던 적이 없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우리는 허위의 시대를 잘 살아낼 수 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 뿐이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으로 구성된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살아간다. 진실과 허위가 뒤엉켜 있는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타인의 위치를 확인하고, 이로써 자신의 위치를 짐작한다. 이야기를 쓰는 것은 결국 우리다. 그 이야기가 드높은 환대와 용기로 쓰이길 바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쟁의 비극을 그려낸 작가 커트 보니것은 그의 소설 <타이탄의 세이렌>에서 하모늄이라는 외계 생명체를 묘사한다. 집단생활을 하는 하모늄은 허위와 폭력의 장막이 둘러쳐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언어 단 두 가지를 제시한다. 두 메시지는 서로에게 응답한다. 첫 번째 메시지는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이고, 두 번째 메시지는 “네가 있어서 기뻐, 네가 있어 기뻐, 네가 있어 기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