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보다 더 급한 것

2025-03-03

2015년 8월 중국 항저우에 있는 알리바바 본사에서 마윈(馬雲) 회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뉴욕증시 상장후 1년쯤 된 때였다. 자신감에 차 있던 마윈은 인터뷰 중 “2030년엔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근거는 데이터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에 있다고 믿었던 100년 전엔 시장 경제가 이겼지만, 빅데이터를 분석해 그 손을 볼 수 있게 된 이젠 계획경제가 더 우월하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마윈과 알리바바 임원들은 기자에게 데이터센터에서 실시간으로 빅데이터를 처리하는 기술과 그 규모, 빅데이터의 가치를 설명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게 중국 전역에 혁신을 일으킬 거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마윈은 “그 미래를 위해 중국 청년들의 창업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마침 그해 5월 중국 국무원은 ‘제조2025’를 발표하며 첨단기술과 미래 산업을 키우겠단 계획을 공식화했다.

중국 ‘제조2025’ 그후 10년

데이터센터도 못 짓는 한국

AI 산업 크려면 갈등 조정이 핵심

알리바바가 일군 인프라 기술의 파급 효과는 최근 항저우의 AI 스타트업 ‘딥시크’를 보며 느끼고 있다. 중국의 30년 장기 계획 중 1단계인 제조2025가 마무리된 올해 중국의 목표는 상당 부분 실현됐다. 첨단 반도체 자립이 진행 중이고, 중국산 여객기(C919)도 날아다닌다. 배터리, 전기차, 디스플레이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올해 1월 전 세계를 놀래킨 ‘딥시크 쇼크’는 무대가 AI로 옮겨왔다는 확인일 뿐이다. 중국 정부는 전국에 데이터센터도 확충했고, 선전·항저우의 혁신 기업들을 체제 선전에 앞세우고 있다.

이들과 경쟁하는 한국 기업들은 기가 질린다. 최근 만난 어느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제조2025 계획 자체보다도 그걸 진짜로 실행해냈다는 게 무섭고 놀랍다”고 평가했다. 개인정보 보호도, 지식재산권에 대한 존중도 없으니 가능한 모델이라는 한계를 모두가 안다. 그래서 중국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 그렇다고 실리콘밸리같은 패권적인 기술 생태계를 가진 것도 아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딥시크 쇼크 이후 한국 정치권은 ‘AI 추격전’을 우리의 길로 본 모양이다. 여야 모두 수조원대 ‘AI 추경’을 주장하며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서둘러 사자고 한다. 대선 모드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2일 유튜브 생중계에서 더 파격적인 주장들을 쏟아냈다. ‘(국민 펀드로 투자해) 엔비디아 같은 회사가 하나 생기고, (그 지분의) 30%를 국민 모두가 나누면 세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무료로 전 국민이 생성 AI를 쓰게 하겠다’ 등. 20대 남성들을 의식한 발언인지 ‘청년들이 왜 막사에서 지내야 하냐’며 군대의 AI화도 주장했다.

과연, 그런 AI 사회가 가능할까. 현실을 보자. 유료든 무료든 AI를 구동하려면 데이터센터 인프라가 필수다. 하지만 한국은 지금 데이터센터 하나 짓는 데 수년이 걸린다. 고양시 덕이동, 김포시 구래동 등 데이터센터 건축을 허가했던 지자체들이 주민 반대를 이유로 착공 허가를 반려하고 있다. 지역 국회의원들은 갈등을 중재하기는커녕 가세해 삭발 시위를 하고 관련 규제 법안을 발의하며 ‘대량의 전자파가 나올 것’이라는 괴담에 빠진 주민들의 불안에 편승하고 있다. 일반 전자레인지보다 배출량이 더 적다는 과학적 사실도 소용없자, 정부는 데이터센터 근처에 전자파 강도를 시각화한 ‘신호등’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데이터센터 하나 짓기가 이렇게 힘든데 이 대표가 말하는 AI 사회가 과연 가능할까.

더 큰 문제는 전력이다. AI 사회를 얘기하자면, 대규모 전력이 24시간 흘러야 하는 데이터센터의 전력원은 어떻게 마련할지도 함께 말해야 한다. 원자력 발전 확대 없이 무탄소 에너지원을 구하기란 쉽지 않은데, 원전 확대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확보 없이는 불가능하다. 부지 선정 과정의 갈등은 누가 중재할 것인가.

계획을 못 세워서 한국이 위기에 빠진 게 아니다. 문제는 실행력이다. SK하이닉스는 122조원을 들여 용인에 반도체클러스터를 짓겠다고 한지 6년만인 지난달 말에야 첫삽을 떴다. 인접 지자체와의 용수·전력 갈등과 토지 보상 문제에 발이 묶인 탓이었다. 그 사이 일본 구마모토현에선 22개월만에 TSMC 공장이 들어서서 이미 가동 중이다.

권위주의 정부와 오래 전 결별한 한국에선 거창한 계획보다 갈등 해결 역량이 미래의 명암을 좌우한다. 정부를 마비시키는 데 혈안이 된 국회와 그걸 깨겠다고 계엄을 선포하는 대통령, 그 책임을 두고 또 싸우는 정치가 계속되는 한 우리 산업의 미래는 어둡다. 정치권의 ‘AI 청사진 전쟁’에서 이젠 그림의 화려함보다 갈등 중재와 조정 능력이 있는 리더인지 보고 그게 가능한 권력 구조의 변화를 약속하는 사람을 택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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