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가 ‘K정치인’을 만나면

2025-03-09

“정치적인 말과 글은 대개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데 쓰인다. (…) 때문에 정치적인 언어는 주로 완곡어법과 논점 회피, 그리고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모호성으로 이뤄진다.”

조지 오웰은 산문 ‘정치와 영어’에서 망가져 가는 언어의 문제를 지적하며, 거짓과 반목 등으로 점철된 정치가 언어의 타락을 이끌고 있다고 진단했다. 오웰의 글을 새삼 읽게 된 건 ‘모호함의 늪’에 빠져 ‘아무 말 대잔치’가 되어버린 ‘K엔비디아’ 논란을 지켜보면서다.

논란을 촉발한 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난 2일 민주연구원 유튜브 채널 발언이다. 이 대표는 “생산성 향상의 결과물을 개인이나 특정 기업이 전부 독점하지 않고 모든 국민이 상당 부분 공유하는 것이 제가 꿈꾸는 기본사회”라며 “(한국에) 엔비디아 같은 회사가 하나 새로 생겼고 70%는 민간이 가지고, 30%가 국민 지분이라면 이를 국민 모두가 나누면 굳이 세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오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K엔비디아 지분 공유’에 대한 역풍은 거셌다. ‘공상적 계획경제 모델’(국민의 힘)이란 비판부터 “얼치기 인공지능(AI) 대박론에 심취해 첨단산업 국유화를 꿈꾸고 있다”(이준석 개혁신당 의원)는 지적까지 ‘반기업 정서’라는 맹공이 이어졌다. 안철수 의원은 “엔비디아가 붕어빵 찍어내는 기계인 줄 아느냐”며 “스타트업 기업의 창업 과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 대표는 ‘K엔비디아’에 쏟아지는 비판을 ‘문맹(文盲) 수준의 식견’이라며 폄하했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과 비전을 전달하기 위한 명료한 언어는 없었다. 화두는 던졌지만, 구상은 모호했다. 근거는 부족했다. ‘K엔비디아’를 어떻게 만들고, 세금에 의존하지 않고 생산성을 공유할 수 있다는 국민 지분 30%는 어떻게 나온 수치인지, 이를 어떻게 유지할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K엔비디아’를 둘러싼 모호한 말은 그래서 듣는 이가 각자의 논리를 펼치고 반박할 여지만 남겼다.

‘K엔비디아 지분 공유’ 엄호를 위해 야당이 끌어댄 각종 사례도 마찬가지다. 국가 주도로 만들어진 대만의 TSMC와 포스코(포항제철)를 소환하고, 국부펀드와 국민 펀드 투자를 언급했지만 명료한 답은 없었다. 엔비디아 정도의 회사 지분 30%를 확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자본 투입이 늘면서 생기는 지분 희석을 막으려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제대로 풀어주지 않았다.

그나마 지난 6일 민주당이 밝힌 최소 50조원 규모의 ‘첨단산업 국민펀드’ 조성 추진 계획이 ‘K엔비디아’에 대한 모호성을 불식하려는 눈에 띄는 시도다. 국민과 기업, 정부와 연기금 투자로 펀드 재원을 조성한 뒤 국내 첨단 전략사업 기업의 주식이나 채권에 집중 투자해 개인과 기업에 배당이나 세제 혜택으로 과실을 나누겠다는 구상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K엔비디아’ 구상이 모호한 정치적 수사로만 그칠 듯한 불안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핵심이 빠져 있어서다. ‘한국판 엔비디아’를 만들기 위한 산업 정책의 청사진과 어떤 기업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저 수익을 나누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모양새다. “밥도 하기 전인데 숟가락 가지고 덤벼드는 것 같다”는 김동연 경기지사의 비판대로다.

혁신을 이끌 기업가 정신과 이를 뒷받침할 창의적이며 우수한 인력, 실패를 견딜 인내심 있는 자본 등 기업이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각종 환경이 갖춰졌을 때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태어날 수 있다. 이런 모든 조건이 마련돼도 엔비디아 같은 성공 신화를 쓰는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있는 기업도 망할 판국이다. 52시간 예외도 풀지 못하는 근로시간 규제를 비롯해 야당의 주4일제 주장은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기업을 옥죄는 입법과 세제·규제도 ‘K엔비디아’의 탄생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환경을 개선하지 않은 채 돈만 쏟아붓는다고 ‘K엔비디아’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야당은 개의치 않는 눈치다.

그러니 이야기는 도돌이표다. 지난 7일 이 대표는 “엔비디아 같은 첨단 기업을 만들어 초기 투자를 정부·국민 단위에서 대규모로 하고 지분을 제대로만 확보한다면 고생하지 않아도 미래가 불안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K엔비디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답은 모호한 정치 언어의 영역에 머문 채 지분 확보를 위한 국민 펀드로 귀결될 뿐이다. 엔비디아가 ‘K정치인’을 만나면 이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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