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후 과거 집착은 연명 치료…명함으로 쓸모 증명 말라"

2025-10-21

삶에 훅 들어온 AI와 기대 이상으로 늘어난 수명 탓에 사회가 정한 낡은 생존 방정식이 무용지물이 돼버린 전인미답의 길 위에서, 우리가 불안을 줄이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엔진은 뭘까요. 많은 전문가는 '질문'을 꼽습니다. 질문을 던져야만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인생을 재정의하는 통찰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부터 이어지는 '질문하는 인생' 시리즈는 다른 이들의 질문을 통해 내 질문을 찾아 나서는 여정입니다.

은퇴 후 닥친 죽음 같은 '노바디' 시간

"쓸모 증명이냐, 진정한 삶이냐"

질문의 힘 덕분에 주도적 인생 속

늙지만 낡지 않고 성장하는 삶 찾아

처음 질문을 던져준 이는 이병남 전 LG 인화원장입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은퇴 후에도 정체성을 과거에 고정하려는 연명 치료 같은 삶을 이어갈 뻔했습니다. 그때 "쓸모를 꼭 명함으로 증명해야 하나", 다시 말해 "난 누구고, 진짜 이런 삶을 원하나"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졌고, 남의 시선에 맞춘 쓸모가 아니라 나의 성장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쓸모를 찾았습니다. 뒤이어 만난 다른 이들도 비슷합니다. 세상이 실패라 부르는 커리어의 벽에 부딪혔을 때, 남들이 불가능하다며 내 앞을 막아설 때, 또 세상의 관성이 자꾸 나를 과거로 잡아당길 때, 어떤 질문이 중심을 잃지 않고 한계를 돌파하는 데 도움을 줬는지 차례차례 소개합니다.

이병남 전 LG 인화원장 인터뷰

과거 이런 고민은 2030 전유물이었다. 수명만큼 외로움도 함께 늘어난 지금은 5060과 7080 역시 똑같은 고민을 한다. 이병남 전 원장(71)도 그랬다. 자발적이고 준비된 은퇴였던 데다 오랜 대기업 임원 생활 덕분에 경제적 어려움도 없었지만, 퇴직 후 딸이 항우울제를 권할 만큼 상실감과 소외감이 컸다. 돈·권력·명예는 진작 내려놨다 여겼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지난해 만 70세를 계기로 "어떤 삶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보다 강도 높게 던졌고, 남을 의식한 사회적 성취(doing)가 아니라 작아져 남에게 스며들 수 있는 존재(being)로 삶의 무게 중심을 완전히 이동했다. 지난달 17일 서울 평창동 이 전 원장 자택에서 나눈 대화를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죽음 같은 노바디

무려 21년 동안의 대기업 임원 생활이 끝난 지난 2016년, 여태 살아온 삶과 완전히 다른 삶이 펼쳐졌다. 밀려 나가는 모양새가 싫어 스스로 은퇴 시기를 정해 2년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다. 1995년부터 모신 구본무 당시 회장에게도 "연말 인사에 참고하시라"고 했다.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은퇴하니 달랐다. 머리로 아는 건 가슴으로 당하는 것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비서와 운전기사 등 각종 예우와 혜택이 하루아침에 떨어져 나가는 경험은 불편함과 당혹감을 넘어 흡사 죽음 같았다. 사회와의 연결선이 모두 끊긴 듯한 황망함, 이런 사회적 단절에서 오는 상실감과 공허감, 노바디(nobody, 아무것도 아닌 사람)가 됐다는 자격지심 탓에 마트와 식당 등 일상에서 만나는 이들의 사소한 불친절과 무관심마저 예사롭게 넘기지 못했다. "난 이런 대접 받을 사람이 아닌데…. "

그러던 와중에 문재인 정부 청와대로부터 공기업 CEO 등 이런저런 자리 제의가 왔다. 솔깃했다. 이상하게 "도대체 언제까지 은퇴를 미룰 거냐"는 질문이 떠올랐다. "난 지금 사회적 쓸모를 증명하려 애쓰나, 아니면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을 살고 있나"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떠밀리는 대신 주도적으로 은퇴한 줄 알았는데, 난 여전히 남의 사회적 기대에 맞춘 삶을 살고 있었다. 과거를 현재진행형으로 착각하면서 연명 치료하듯 과거 삶의 방식을 좇으려던 거다. 내 정체성을 자꾸 과거에 고정하면 불행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아차 싶었고, 청와대 제안을 거절했다. 솔직히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진짜 내 인생을 막 살기 시작한 전환점이었다. 나를 증명하려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신, 그렇게 확보한 시간에 나를 돌보니 비로소 진짜 내가 보였다. 대학 졸업 후 그 시절 최고 직장 대우실업을 3년 만에 관두고 낯선 학문이던 노동문제·노사관계 공부하러 3년 치 월급 탈탈 털어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건 긴 근무시간에다 "하면 된다"고 밀어붙이는 회사생활 속에서 삶의 주도권을 잃고 매일매일 뇌세포가 죽어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걸 벗어나러 떠났는데, 정신 차려보니 거기 남으려고 은퇴 후까지 기를 쓰고 있었다. 내가 누구고, 뭘 원하는지 잊은 채로.

만약 그때 질문 없이 사회적 관성을 따랐다면, 늙지만 낡지 않고 계속 성장하는 지금의 삶은 절대 살지 못했을 거다.

노화 속 성장하는 백수

등산을 정말 좋아해 평생 고교 동창들이랑 산을 다녔다. 그런데 은퇴 직전 발목관절염 진단으로 등산 금지령을 받았다. 수영하다 또 탈이 났다. 몸의 한계는 은퇴로 가뜩이나 위축된 마음을 더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의사가 "나이 60 넘으면 매년 4%씩 근육이 줄어드니 반드시 근력 운동을 해라"기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피트니스센터에서 퍼스널 트레이닝(PT)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턱걸이한 지 어언 50년이 넘었는데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코치는 "회원님은 월 싯, 스쿼트에 관한 한 최소한 종로구 최고"라며 운동 마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 " 이런 말도 붙였다.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합니다. "

성장. 가슴 뛰는 단어였다. 헛되이 남에게 인정받고 쓸모를 증명하느라 잊었던 이 말을 들으면서, 내 삶이 뻥 뚫린 고속도로가 아니라 비포장 국도에 접어든 만큼 속도는 늦출지언정 계속 성장하겠노라 마음먹었다. 불안이 더는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니듯, 성장도 젊은이의 전유물은 아니다. 아예 나 스스로 별명을 붙였다. 노화 속에 성장하는 백수, '노성백'이라고.

노년의 성장이란 뭘까. 난 내적 성장과 관계의 성장 같다. 은퇴 전 내 삶의 태도는 또래 한국 사람들과 똑같이 치치집(치열하고 치밀하고 집요하게)이었다. 그걸 느조심(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으로 바꿨더니, 자꾸만 외부로 향하던 관심사가 자연스레 내면의 성장과 관계의 깊이로 향했다. 일이 1순위이던 시절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할 기회가 없었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지 못했다. 비단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은퇴자가 적막강산에 고립무원의 고통에 사무치는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우린 살아가려면 반드시 다른 사람이 필요하고, 늙으면 더 그렇다. 그런데 현실 감각 없이 과거 한 시절에 고착한 '라떼'(꼰대)가 여전히 팽창된 자아로 과거 영광을 연장하려는 노욕을 보인다면 누가 곁에 머무르겠나. 관계는 서로에게 스며들어야 가능한데, 상대의 그 작은 틈새에 스며들려면 나부터 작아져야 한다. 인정 욕구를 현직 때처럼 직위·직책에 의지해 해소하지 않고 남이 나를 필요로 하는 데서 찾기 위해 점점 더 작아지려 노력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도 중심은 나다. 내가 보고 싶은 사람만 보는 걸 원칙으로 세웠다. 보고 싶은 사람? 잘나가던 시절 회사 얘기나 정치 얘기, 남 험담 말고 오롯이 자기 얘기 하는 사람이다.

한계는 기회

조지아 주립대 교수 시절 미국 주요 혁신 기업을 케이스 스터디한 덕분에 노사관계 공부하러 온 LG그룹 사장단 전부와 만났고, 이게 인연이 돼 1995년 LG에 합류했다. 2000년 지주사 인사팀장 발령 전까지 5년을 인화원에서 보냈다. 그땐 버티기 힘들었는데 돌아보면 고통 속에서 깨달음을 얻은 시기였다.

오너의 주목을 받는 전문가가 임원으로 입사했으니 막말로 거리낄 게 없었다. 그런데 다면평가에서 형편없는 점수가 나왔다. 낮은 점수도 모욕적이었지만 나쁜 점수 준 동료·선후배에 대한 배신감에 붉으락푸르락했다. 멘토 그룹 선배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자네 100m 뛰러 왔나, 마라톤 뛰러 왔나. " 또 능력 부족한 아랫사람이 오히려 나를 씹고 다니는 걸 알고 "못 해 먹겠다, 회사 관두겠다"고 불만을 토했을 땐 또 다른 선배가 이렇게 질문했다. "이 박사, 언론 자유 알아? 언론 자유는 누굴 위해 있는 거야?" 나는 강자고, 강자는 약자 얘기를 들어줘야 한다는 걸 스스로 깨닫도록 던진 질문이었다.

인사팀장 발령받기 바로 전해는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해였다. 당시 원장이 부원장인 나를 견제하느라 결재란에서 아예 제외해 몇달 동안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회사에 사의를 표하자 "조금만 참고 기다려보라"는 조언을 들었고, 이를 받아들여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일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또 던졌다. 인사팀장이 됐을 때 후임자 플랜, 임원 직급 간소화, 주5일제 도입 등 어마어마하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 비단 나이의 한계인 은퇴를 앞둔 사람만이 아니라 투병이나 실직, 승진 좌절 등 다른 많은 한계에 부딪힌 이들에게도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한계에 맞닥뜨렸을 때를 성찰의 기회로 삼으라는 말이다. 뻔하지만 정말 중요한 얘기다. 내가 진정 원하는 건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쁜 일상의 연속일 땐 내 삶을 점검할 질문을 던지기 어렵다. 한계 앞에 서야 비로소 물을 수 있고, 또 물어야만 한다.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나는 언제 가장 행복한가. " 이런 질문과 답을 찾는 과정을 통해 한계라 낙담했던 게 그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열린 새 문을 통해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지 모르는 일이다.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이런 질문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리고 평소 크기에 상관없이 숨 쉴 공간을 마련해두면 자신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는 좋은 질문을 끌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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