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만에는 박태준의 별이 반짝거린다

2024-11-28

포항·광양제철 일군 박태준

우리나라 남해안에는 멋진 공장이 하나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직사각형 모양인데 한쪽 부두에서 원료를 배에서 내리면 반대편 부두에서 완제품이 나와 곧바로 실려진다. 포스코 광양제철소가 그러한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철강제품 원료는 철광석과 석탄이고 완성품도 강판과 코일이라 무게가 많이 나가서다. 이것들을 차로 실어나르면 물류비가 엄청나게 증가해 철강산업이 경쟁력을 지니려면 가능한 한 육송은 줄이고 배로 운반해야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철강 도시 피츠버그가 무너진 것도 애팔래치아 산맥의 철광석과 석탄을 사용해 물류에서 육송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서였다.

탄소 찌꺼기 제거 최고 제품

광양제철소는 모양만 멋진 게 아니다. 단일 제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 가격경쟁력에서 유리해 경제성을 잘 갖춘 공장이다. 또 여기서 출하되는 제품은 최고 품질을 자랑해 전 세계에 굴러다니는 자동차 10대 중 1대가 광양제철소에서 만든 제품으로 차체를 만들었다. 자동차 차체는 튼튼하면서 가벼워야 해 최상의 품질이어야 하는데, 광양제철소에서 만든 제품은 탄소 찌꺼기를 최대한 제거함으로써 이것이 가능했다. 그러니 현대자동차가 토요타나 폭스바겐과 함께 세계 3대 자동차 메이커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도 광양제철소가 아니면 불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모두 우려할 때 일본 정재계 설득

청구권자금 용도 제한 규정 고쳐

포철 ‘산업의 쌀’이 중공업 일으켜

세계 자동차 차체 10% 광양 제품

포철 기업공개 때 한 주도 안 받아

이재용 “국내 산업의 잡스 같은 분”

그뿐만이 아니다. 철은 산업의 쌀이어서 일관제철소를 갖추지 못하면 중공업을 일으킬 수 없다. 그래서 광양이나 포항에 제철소가 없었으면 후판과 핫코일과 같은 반제품을 외국서 수입해 써야 했는데 그러면 가격경쟁력에서 밀려 우리의 조선업·방위산업·기계공업은 상상할 수 없다. 또 경공업 단계를 빨리 벗어나지 못해 지금과 같은 경제적 번영은 요원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철강산업은 산업사회의 국부를 상징하므로 1889년 파리박람회 때 상징물로 에펠탑을 세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프랑스는 에펠탑 건립을 통해 영국에 비해 늦었던 산업혁명의 콤플렉스를 상쇄코자 했다.

그런데 일관제철소가 세워진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 1960년대 경제개발을 시작해 70~80년대는 중공업으로 나아가야 했는데 이때 포스코(구 포항제철)가 설립되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때를 놓쳐선 안 되는 것처럼 좋은 제철소를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때를 놓치지 않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포항에 제철소를 만든다고 발표했을 때 당시 이르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그렇지만 이때 과감히 밀어붙인 게 오히려 적기가 되었다. 물론 일관제철소 건립 계획은 1968년부터 시작되는 제2차 경제개발계획에 포함되었지만 많은 난관 때문에 과연 이뤄낼 수 있을까 모두가 의아해했는데 박태준은 이를 해냈다.

필요한 자금·기술·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제철소 건설은 사실 무모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야당의 반대 또한 만만치 않았다. 또 우리 정부로부터 자금 제공을 의뢰받은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우울했다. 한국은 일관제철소를 짓고 운영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해서다. 자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제철소 건설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박태준은 대일청구권자금을 변통하면 가능하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허락받았는데 대일청구권자금은 농어업 부분에만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또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이 난관을 일본의 정·재계를 끊임없이 설득해 제철소 건설 자금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물론 대일청구권자금만으로는 건설비용을 모두 충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건설비용을 줄이기 위해 공기 단축을 시도한 결과 예정보다 빨리 포항제철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공사 기간 단축으로 인한 부실공사는 없었다. 한때 부실공사가 발견되자 80%나 진척된 공사현장을 폭파해 다시 짓도록 한 일이 있어서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삼성전자의 불량 제품들을 모아서 임직원이 보는 앞에서 불태운 것도 박태준의 이런 모습을 본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부족한 자금을 해결하기 위해 한쪽에선 제철소 건설을, 다른 한쪽에선 제품 생산을 병행했다. 그래서 철강제품이 만들어지는 순서대로 공장을 짓지 않고 후순위 공정인 압연공장을 먼저 세운 뒤 외국서 수입한 반제품을 압연공장에서 가공해 여기서 나온 제품을 우선 판매했다. 그리고 여기서 생긴 여윳돈을 건설 자금에 보탰다. 마침내 제철소의 핵심인 고로(高爐)가 완성되자 반제품을 더 수입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생산한 반제품을 압연공장에 보내 마침내 일관제철소 체제를 완성 시켰다.

덩샤오핑이 제철소 건설 부탁

따라서 박태준을 빼놓고선 지금의 포스코를 말할 수 없다. 일례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은 1968년 포항제철소에는 자금 제공을 거부하고 브라질 제철소에는 허락한 바 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86년 포항제철의 조강 능력은 1200만t(현재는 2100만t)이 된 데 반해 브라질 제철소의 조강 능력은 400만t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브라질 제철소의 제품은 품질이 떨어져서 경쟁력에서도 밀렸다. IBRD에서 이 결정을 내린 사람은 그 후 이런 결과에 대해 한국에는 박태준이 있지만, 브라질에는 없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변명했다. 오죽했으면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도 박태준에게 중국에 포항제철소와 같은 근사한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부탁했겠는가?

광양제철소는 광양만을 메워 만들었는데 광양만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을 벌이다 전사한 곳이다. 이순신이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단 한 명도 돌려보낼 수 없다는 각오로 죽음을 불사하며 싸웠던 곳이다. 그러니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곳인데 박태준은 여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제철소를 지었다. 그 결과 광양만은 우리보다 철강산업을 훨씬 빨리 일으킨 일본과 서구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든 곳이 되었다. 이것이 19세기에 서구 열강으로부터 받은 조롱과 20세기에 일본으로부터 당한 설움을 씻는 길이 아닐까? 따라서 20세기에 이순신과 같은 사람을 찾으라고 한다면 단연 박태준을 꼽아야 한다.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면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하는데 이 항구에 들어서기 전 오른쪽 멀리에 일본 최초의 일관제철소인 야하타제철소가 보인다.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이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널 때마다 이 제철소를 얼마나 부러워했을까? 게다가 야하타제철소는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지었는데 이 돈은 당시 일본 1년 예산의 3배, 청나라 예산의 2배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다. 이 금액의 절반 이상이 야하타제철소 건설에 쓰였는데 이 제철소는 러일전쟁·태평양전쟁에 전쟁물자를 공급하는 주요 기지가 된 데 반해 박태준의 제철소는 우리나라 산업화에 획기적으로 이바지했다.

삼성의 이재용 회장은 박태준이 죽었을 때 ‘스티브 잡스가 IT 업계에 끼친 공로보다 박태준 회장이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이 더 크다’라고 조문록에 썼다. 사실이 그렇다. 그가 적기에 포항제철을 세우지 못했으면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지금의 한국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도 포항제철이 명실공히 국민 기업이 되기 위해 주식을 공모했을 때 그는 한 주도 받지 않았다. 전체 발행주식의 10%가 우리 사주 몫으로 배정되었는데 그중 0.1%만 받았어도 2004년의 주식가 기준으로 150억 원이나 되는 돈이다.

“공적인 일에 사욕 있어선 안 된다”

그가 이렇게 처신한 데는 이유가 있는데 함께 일한 포철 임직원들 앞에서 행한 마지막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공적인 일을 하는데 사욕이 있어선 안 된다. 회사의 종잣돈이 우리 조상들의 피의 대가였던 사실이다. 대일청구권자금. 그 식민지 배상금으로 포항제철 1기를 건설할 수 있었다. 우리의 추억이 포스코의 역사 속에 조국의 현대사 속에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것을 우리 인생의 자부심과 긍지로 간직합시다.” 그는 이처럼 명예를 먹고 산 사람이었는데 광양만에는 이순신과 함께 그의 별이 반짝거리고 있지 않을까?

김정탁 노장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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