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캄보디아 보코산에서 1만909㎡(3300평) 규모 딸기 농장을 운영하는 장지용(56)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15일 딸기를 배달하러 프놈펜에 들른 장씨는 느닷없이 발이 묶였다. 대학생 박모(22)씨가 고문 끝에 숨진 채 발견된 보코산 지역과 바벳시, 포이펫시 등 베트남·태국 접경지역에 대해 외교부가 16일 자정을 기해 여행경보 4단계인 ‘여행금지’를 발령하면서다. 한국 국적자는 여행금지 지역에 방문하거나 체류하면 여권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
영주, 기업 활동 등 사유로 ‘예외적 여권’을 발급 받을 수 있지만 까다로운 절차에 장씨는 또 한 번 좌절했다. 거주지·경호 계약서 등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데다 심사가 한 달 이상 소요된다는 외교부 홈페이지 안내를 보고 나서다. 장씨는 17일 정부 합동대응팀을 만나 사정을 설명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프놈펜에 머물고 있다. 장씨는 “딸기 재배가 어려운 캄보디아에서 갖은 고생 끝에 꽃 피운 사업”이라며 “정부가 피의자를 국내로 송환하는 것 만큼 생계가 걸린 교민의 문제도 신속히 다뤄줬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이에 외교부는 19일 오후 언론 공지를 통해 “해당 교민에 대해선 안심하고 복귀하셔도 된다는 점을 안내했고,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 절차 진행과 관련해서도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범죄 국가’ 낙인, 교민 피해 막심
캄보디아 감금·폭행 사태의 유탄을 맞은 교민들의 한숨도 커지고 있다. ‘범죄 국가’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생업에 위협을 받는 교민들에 대한 관심과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교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캄보디아에는 1만626명의 교민이 살고 있다. 포이펫의 한 교민은 “한국어를 가르치는 세종학당은 철수 명령으로 직원이 다 빠져 나가서 한글날 행사도 차질이 생겨 난감해하는 걸로 안다”며 “4단계면 전쟁에 준하는 상황인데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예약 줄취소는 예삿일이다. 프놈펜에서 10년째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이세형(58)씨는 “11월부터 2월까지 성수기인데 사태가 터지고 700여건의 예약이 취소됐다”며 “코로나도 겨우 넘기고 상승세에 접어들었는데 다시 암울해졌다”고 했다. 그는 “경위를 떠나 자국민이 사망에 이르는 사건이 발생해 교민들도 슬픔을 통감하고 있다”면서도 “고객에게 여행, 출장 등 평범한 목적의 방문은 안전하다고 말씀드려도 믿지 않고 유인책으로 의심까지 받는 상황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한국 관련 업무를 맡는 캄보디아인도 덩달아 피해를 보고 있다. 통역사 시엠 레이카나(35)는 “예정된 출장이 전면 취소됐다는 통보가 잇따르고 있다”며 “카카오톡이나 전화가 울리면 겁이 날 지경”이라고 말했다.

이번 감금·폭행 사태 피해자와 평범한 관광객을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현재까지 정부가 확인한 피해자는 자발적으로 범죄 단지에 들어가거나 ‘취업 사기’ 등 통상적이지 않은 경로로 캄보디아에 입국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재한캄보디아한인회는 18일 간담회를 열고 조속한 여행금지령 하향을 촉구했다. 참석자 박모씨는 “감옥에 있던 60여 명을 송환하고 다 해결된 것처럼 정부가 얘기하지만 바뀐 건 하나도 없다”며 “결국 여기 있는 교민들이 뒷감당을 다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교민 의견을 청취한 고상구 세계한인총연합회장은 “공적개발원조(ODA) 중단이나 군사 작전 등의 발언을 쉽게 하는데 국민들은 감정이 격할 수 있어도 정부와 정치권은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자칫 캄보디아에서 반한 감정이 불 붙으면 현지 교민 생계는 물론이고 안전에도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더불어민주당 재외국민안전대책단 부단장으로 캄보디아를 찾은 홍기원 의원은 18일 페이스북에서 “실제 대표단이 돌아본 캄보디아(프놈펜) 치안 상황은 특별히 다른 지역보다 위험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면서 “1만여 캄보디아 거주 동포들도 정부의 보호가 필요한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강조했다.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은 지난 17일 열린 기자회견에 교민 피해 관련 질의에 대해 “여행금지령을 지정한 곳은 현지 분이 10명 내외 아주 소수로 확인했다”며 “(금지령 하향) 검토를 계속하고 있는데 결국 캄보디아 내 모든 스캠 범죄의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하향 조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