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폭설이 되었던 날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책 관련 행사가 있어 경기도로 이동 중이었는데, 이동 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끔 그저 길 위에 멈춰 있었다. 대부분의 차들이 도로에 바퀴가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 있다 아주 조금씩, 느리게 이동했다. 나는 눈 때문에 차들의 번호판이 완전히 가려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언니는 차를 몰고 나섰다 도로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딱 십 분 나와 있었거든? 근데 번호판에 온통 눈이 쌓여서 주차장 들어가려는데 번호판 기계 인식이 안 되는 거야.” 언니는 차에서 내려 번호판에 쌓인 눈을 손으로 닦아낸 뒤에야 주차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도로 위 차들의 번호판마다 빼곡히 눈이 쌓여 새하얬다. 눈의 무게 때문에 가로수 나뭇가지가 우직우직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길 위에 있었다.
도로는 미끄러지는 차와 미끄러지지 않으려는 차들로 엉망이었다. 질척한 눈구덩이에 바퀴가 빠져 헛돌고 단단하게 다져진 얼음눈에 미끄러지고 기어이는 옆으로 뱅글 돌아가는 차들 천지였다. 나는 간선버스 안에서, 수시로 탄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도로 위 차선이 완전히 지워졌다는 사실이 내게는 차들의 번호판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두려웠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차들이 아무 곳으로 돌아앉는 통에, 구덩이를 피해 이리저리 흩어진 차들이 아무 방향으로 나아간 탓에 도로 위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버스는 정면으로 오는 차와 몇 번이고 마주쳤다. 어느 쪽이 중앙선을 넘은 건지 알 수 없어 두 차는 조금씩 각자의 오른쪽으로 차를 틀어 충돌을 피했다. 눈일 뿐인데, 녹아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눈일 뿐인데도 그랬다. 눈은 지독하게 결집하고 수시로 몸의 형체를 바꾸며, 충분한 예보가 있었음에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거대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행사가 끝난 것은 캄캄한 저녁이었다. 모든 선이 사라진 도로 위로 오전보다 훨씬 견고해진 눈의 결집이 이제는 빙판이 되어 있었다. 눈과 어둠에 점령당한 도로 위는 조금도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차고지에서 출발도 못 한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망연히 서 있을 때였다. “작가님.” 작은 목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저는 저 앞에 차 타고 가면 되거든요. 이게 별로 따뜻하지 않긴 한데.” 강연장에서 만났던 학생이 내게 핫팩을 건네며 말했다.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나는 엉겁결에 핫팩을 받아들었다. 따뜻했다. 그것은 핫팩의 최고 온도가 몇 도인지,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지 따져보게 되는 그런 식의 열기가 아니라 잔잔하게 스며드는 다정한 온기에 가까웠다. 이후 몇 시간에 걸쳐 집에 도착하기까지 나는 작은 핫팩을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사방이 새카맣고 도로는 괴기할 만큼 새하얬으나, 여전히 굵은 눈이 내리고 있었으나 괜찮을 것 같았다. 손에 쥔 온기로 하여금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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