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루게릭이 찾아왔다
3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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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과장으로 사회에서 인정받던 남자는 꼼짝 못 하고 침대에 딱 붙은 신세가 됐다. 혼자 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은 눈을 깜박여 간단한 의사를 전달하는 것. 숨 쉬는 것조차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상태다. 정신은 또렷해 가끔은 몸속에 갇혀 암흑을 헤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43세. 한창 사회활동을 하며 가족과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때지만 가혹하게도 온몸을 점령한 사멸의 기운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지난달 31일 수도권의 자택에서 만난 루게릭병 환자 문승윤씨는 굳은 몸으로 누운 채 눈물을 흘렸다. 눈이 시려서인지, 감정이 북받쳐서인지 알 길이 없다. 그에게 삶은, 그리고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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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신은정(52)씨의 사연을 소개한 기사에 “힘겨운 상황에서도 가족, 친구들과 소통하며 등단까지 한 삶이 존경스럽다”는 댓글이 달렸다. 신씨는 환자와 주변인의 사회적 소통이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잘 보여줬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환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족이다. 중증 루게릭병 환자는 24시간 돌봄이 필요해 가족들도 많은 어려움을 호소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환자와 가족 모두가 바라는 것은 좀 더 나은 돌봄 환경에서 일상을 이어가는 것이다. 3~4화에서는 루게릭병 환우와 가족의 이야기를 담는다.
문승윤씨는 2019년 8월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 그와의 첫 인터뷰는 지난해 7월 안구마우스를 통해 이뤄졌다. 이후 눈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더 이상의 직접 인터뷰는 힘들어졌다. 짧았던 인터뷰 내용에 승윤씨의 블로그(클릭하시면 연결됩니다) 글(2021년 8월~2023년 10월)과 부인 김주희(39)씨의 이야기를 더해 그의 솔직한 심정을 헤아려본다. 블로그 인용 글은 작은따옴표로 표기했다.
#똥 제대로 밟은 내 ‘보호자’에게 심심한 위로를
승윤씨의 침대 옆에 선 부인 김주희(39)씨가 한참을 조잘댄다. 말도 못 하고 냄새도 못 맡지만 인지능력과 청력은 그대로다. 눈이라도 깜박해 주면 내 말에 공감해 주는 것 같아 위안을 받는 그녀다. 존재만으로 소중한 사람.
서로를 매만질 수는 없지만 주희씨가 손 마사지로 애정 표현을 한다. “좋다”고 화답은 못 해도 승윤씨의 눈이 이내 스르르 감긴다. 몸이 편하다는 뜻이다.
둘은 사내 커플이다. 2009년의 어느 날, 스물여덟의 신입사원은 통통 튀고, 예쁜 네 살 어린 입사 동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주희씨가 당시를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눈에서 하트 나오는 줄 알았어요.” 끈질긴 대시에 성사된 밥 한 끼로 연애가 시작됐다. 승윤씨는 손편지를 자주 써주는 다정한 연인이었다. “이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제 모습이 좋았어요.” 이들은 5년 후 결혼했고, 이듬해 아들 ‘사랑이’(태명)가 태어났다.
여느 부부가 그렇듯 결혼 후 크고 작은 갈등이 있었지만 2019년 발견된 루게릭병은 다른 차원의 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