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식구는 아직 잠들어 있는 이른 아침, 그는 먼저 일어나 라면을 끓인다. 아침부터 라면을 먹는 일은 흔치 않지만, 그에게 아침 라면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작은 자립의 순간이다.
발달장애 부모들 사이에서는 “스스로 라면을 끓일 수 있다”는 말 자체가 자랑이 된다. 이제 그는 라면뿐 아니라 짜파게티도 간혹 만들어 먹고, 심지어 차가운 물에 헹궈야 하는 비빔면도 혼자 해결한다. 그들 세계에서는 제법 고난도의 작업이다.
집안일도 조금씩 넓어졌다. 빨래가 쌓이면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넣고 세탁기를 돌린다. 탈수가 끝나면 세탁물을 건조기로 옮겨 놓는다. 청소기를 돌릴 줄도 알고, 가습기 물이 떨어지면 정수기 물을 받아 채워 넣는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일상이다.
특수학교 입학 당시, 어떤 부모는 선생님께 간절히 부탁했다.
“졸업할 때까지 라면 끓이는 것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뇌성마비로 거동이 불편한 중증장애 자녀가 부모 없이도 최소한 ‘라면 한 그릇’은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많은 노력에도 그는 졸업 때까지 그 단계를 넘지 못했다. 부모가 떠난 뒤에도 살아갈 최소한의 능력 한 조각,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유치원 발표회 때, 그는 무대 의상을 끝까지 거부했다. 하지만 얼마 전 복지관에서 열린 난타 공연에서는 무대 한가운데 서서 북을 신나게 두드렸다. 타점도 동작도 어설펐지만, 우리는 깊이 감동했다. 스스로 닫아 버린 문 너머에서 영영 나오지 않을 것 같던 그였지만, 시간은 그의 마음에서 조금씩 빗장을 느슨하게 풀고 있었다.
“사과 두 개 가져와.”
그는 정확히 두 개를 쟁반에 담아 가져온다. 하나와 둘을 구분한다. 먼저 말하는 경우는 적지만, 우리가 지시하는 대부분의 사물을 이해하고 수행한다. 아직은 ‘물 좀 가져오고, 부엌 불도 꺼줘’처럼 복문식 지시는 어렵다. 한 번에 하나씩—‘물 가져오기’, ‘부엌 불 끄기’—따로 부탁해야 한다.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뒤돌아보면 이미 수많은 단계를 넘어온 그의 발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다.
장애인의 부모들은 공통된 소망이 있다.
“아이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싶다.”
우리가 떠난 후, 아이가 홀로 살아갈 세상은 막연하고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아이들이 만들어 낸 작은 성장의 조각들은 부모에게 다시 하루를 버틸 이유가 되어 준다.
그가 끓여낸 라면 한 그릇은 소박하지만 가장 눈부신 자립의 증거다.
강귀만 울산장애인부모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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