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100년 내다보는 실용 외교

2025-10-29

“높은 관세는 다른 나라의 보복과 격렬한 무역전쟁을 촉발합니다. 그러면 기업과 산업이 문을 닫고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이달 24일 미국 프로야구메이저리그(MLB) 우승팀을 가리는 월드시리즈 1차전을 생중계한 방송의 광고에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국 프로풋볼(NFL) 결승전인 슈퍼볼과 함께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월드시리즈는 광고 시장의 최대 이슈다. 하지만 이날 경기 이후 전 세계 언론은 경기 결과보다는 게임 도중 송출된 광고의 파장에 더 주목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소셜미디어에 “캐나다가 레이건의 관세 관련 연설을 조작한 허위 광고를 내보낸 것이 적발됐다”며 “심각한 왜곡과 적대 행위에 대한 대응으로 캐나다 관세율을 10% 추가 인상한다”고 썼기 때문이다.

이 광고를 제작해 미국 TV에 송출한 곳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정부다. 미국을 상대로 보복관세 철회 등 유화 전략을 펼쳐온 캐나다 정부의 노력은 이 광고 한 편으로 허사가 됐다. 그런데 온타리오주가 내보낸 광고는 트럼프 대통령 말처럼 거짓일까. 실제로 레이건 전 대통령은 1987년 4월 일본산 반도체에 100%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의 라디오 연설을 하며 “장기적으로 이런 무역장벽이 미국 노동자와 소비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언급했다.

캐나다 경제의 향배를 좌우할 수 있는 통상 협상을 앞두고 온타리오주가 보인 행태는 관세 협상 타결의 막바지 문서 조율을 하는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레이건은 자유무역주의자였지만 미국의 글로벌 패권과 경제 이익을 위해서는 동맹국에 고강도 관세를 강제할 만큼 철저한 미국 우선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감세를 통해 기업의 투자를 늘리고 생산을 촉진하면 일자리가 대거 창출되고 경제성장도 이뤄질 것이라 믿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우고 있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선거 구호는 레이건이 1980년 대통령 선거 캐치프레이즈로 쓴 것을 차용한 것이다. 레이건은 자유무역이 경제 번영의 토대라고 믿었지만 자국 경제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일본산 반도체와 유럽의 철강 및 농산물에 강도 높은 관세를 매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온타리오주의 광고 내용은 가짜(fake)는 아니지만 트럼프의 시각에서는 명백히 ‘사기(fraud)’로 보여질 수 있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지금 경주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을 계기로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세 협상을 통해 양국 무역 갈등의 해법을 찾으려 했지만 물거품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APEC을 앞두고 “카니 총리와 회담할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글로벌 주요 지도자들이 모이는 경주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전 세계 이목은 트럼프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담판에 쏠려 있다. 트럼프와의 만남을 코앞에 두고 중국은 희토류 통제를 1년 유예하겠다며 유화 조치에 나섰다. 트럼프 행정부 1기 미중 무역전쟁에서 2000억 달러 규모 미국산 제품 구매 약속으로 무역 합의를 끝냈던 중국은 이번에도 적절한 수준의 스몰딜로 협상을 마무리하겠다는 생각이 역력해 보인다. 2020년 성사됐던 미중 간 1차 무역 합의는 그해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간 코로나19 팬데믹 탓에 사실상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미중 무역전쟁이 세계 주도권을 다투는 패권 경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트럼프와 시진핑 간 단 한 번의 담판으로 마무리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과거 미중 무협 협상을 보면 경주 APEC 정상회의 기간의 미중 합의는 지루하고도 긴 미중 패권 전쟁의 한 국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우리 정부가 조심해야 할 점은 조바심과 초조함이다. 자칫 명분과 팩트(fact)만을 내세우며 온타리오주의 TV 광고처럼 상대의 화를 돋우면 그 결과는 눈에 보듯 뻔하다. 29일 한미 정상 간 협상에서 양국이 무역 합의를 이뤘지만 후속 조치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양국 간 남은 각종 협상 이슈에서 실리를 챙기려면 꾸준한 설득과 인내가 필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그동안 “한미 동맹을 토대로 주변국 관계도 국익과 실용의 관점에서 접근하겠다”고 강조했다. 그 어느 때보다 국익에 기반한 전략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실용 정부’라면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는 정책이 아니라 10~20년을 넘어 100년을 내다보는 선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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