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4 용지를 42번 접으면 달까지 닿는다.”
어느 베스트셀러에서 본 문장이다. 두께 0.1㎜ 남짓한 종이가 수십 번 접기만 하면 달까지 이어진다니 선뜻 믿기가 어렵다. 직접 계산해 보았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평균 거리는 약 38만4400㎞. 종이를 접을 때마다 두께가 두 배가 되니, 0.1㎜에다 2의 42 제곱을 곱하면 약 43만9804㎞가 된다. 실제 달까지 닿고도 남는 거리다. 수학적으로 분명 사실이다.
A4 용지 42번 접으면 달까지?
그럴싸하지만 현실에선 불가능
이렇게 덧칠된 의료정보 쏟아져

경이롭긴 한데 뭔가 이상해 종이 면적을 따져 보았다. A4 용지의 면적은 623.7㎠인데 이를 42번 접고 나면 1.4181×10-10㎠가 된다. 세포보다 작고 바이러스와 비슷한 크기다. 결국 두께는 0.1㎜로 유지하면서 면적만 바이러스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수학적으로는 가능해 보여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마지막 접기에서 지구와 달 사이 거리의 절반을 한 번에 접어야 하니 애초에 실현될 수 없는 이야기다.
다른 방법도 떠올려 보았다. A4 용지를 반으로 접어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 어떨까. 계산해 보니 달까지 닿으려면 무려 1조9220억장이 필요하다. 그 수만큼 접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달까지 닿는다’라는 말은 언뜻 그럴듯해 보여도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이 계산을 마친 뒤로는 책에 대한 신뢰가 뚝 떨어져 더는 읽을 수 없었다. 지금은 서재 한쪽에 장식품처럼 꽂혀 있다.
의학 정보에서 이런 착시를 흔하게 발견한다. “사망이나 질병 위험이 몇 배 늘었다”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사망 위험이 두 배로 늘었다는 기사를 보자. 100명 중 1명에서 2명으로 늘어난 경우와 100만 명 중 1명에서 2명으로 늘어난 경우는 전혀 무게가 다르다. 표면상 ‘2배 증가’라는 말은 같지만, 실제 의미는 후자가 훨씬 가볍다. 그런데도 연구자와 언론은 시선을 끌기 위해 ‘100만 명 중 1명 증가’ 대신 ‘2배 증가’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최근 ‘리터러시(literacy)’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본래는 글자를 읽고 쓰는 능력을 뜻했지만, 이제는 이미지·미디어·컴퓨터 등 다양한 매체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까지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장됐다.
의학 정보에도 리터러시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지식의 폭발적 증가가 있다. 1950년대 연간 수만 편에 불과하던 의학·생명과학 논문은 이제 매년 100만 편 이상 발표된다. 학술지도 수백 종에서 8000종 이상으로 늘었다. 지금은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다.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가려내고 근거를 판별하는 능력은 바로 건강을 지키는 역량이다. 숫자와 표현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속 의미를 읽어내는 힘이 필요하다.
정보 전달 방식의 변화도 영향이 크다. 과거에는 신문이나 방송 같은 전통 매체를 거쳐야 했지만, 이제는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누구나 정보를 손쉽게 확산시킬 수 있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자극적이고 눈길을 끄는 내용이 먼저 퍼져나간다.
얼마 전 방송에서 한 교수가 “물을 하루 2L 마시거나 저염식을 하면 저나트륨혈증으로 급사 위험이 커진다”라고 말해 전문가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지인이 이상하다며 보여준 영상을 확인해 보니 사실과 다른 내용이 꽤 있다. “어떻게 이런 내용이 방송에 나오느냐”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냉정히 말하면 이런 사례는 우리 주변에 이미 차고 넘친다. 특히 교수나 전문가라는 이름이 붙을 때 혼란이 가중되었다. 지금 시대에 의학 정보를 올바로 읽어내는 힘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다.
하버드 같은 명문 대학의 연구 결과나 네이처 같은 권위 있는 학술지에 실린 논문은 신뢰를 쉽게 얻는다. 하지만 제삼자가 같은 실험을 반복했을 때 동일 결과가 나온 비율은 10~40%에 불과하다. 유명 학술지에 실린 연구조차 재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재현 위기(reproducibility crisis)’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물론 과학계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주의할 사항은 권위 있는 학술지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무턱대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실제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선 여러 단계의 검증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의학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숫자와 표현, 권위만 좇다 보면 달까지 종이를 접는 계산처럼 현실과는 동떨어진 결론에 이르기 쉽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힘이다. 정보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않고 본질을 읽어내는 능력이 바로 건강을 지키는 핵심 역량이다.
오상우 동국대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