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인 듯 애니영화인 듯…‘혜원전신첩’의 대변신

2024-10-06

[주간경향] 암막을 걷으면, 마치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고요하고 깊은 어둠 속에서 한글 자음, 모음 형체가 하나씩 빛을 낸다. ‘훈민정음’이라는 하나의 우주가 탄생한 순간으로 초대받은 것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지난 10월 2일 관람한 간송미술관의 몰입형 미디어아트 ‘구름이 걷히니 달이 비치고 바람 부니 별이 빛난다’(‘구·달·바·별’)의 첫인상이다. 이 전시에선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우리나라 국보·보물, 주요 작품 99점을 디지털 콘텐츠로 만날 수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을 비롯해 겸재 정선,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의 작품 등을 주제로 한 8개 대형 전시실이 마련됐다. 인터미션(휴식) 공간, 체험존 등을 포함해 총 1462㎡(411평)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전시다.

■신윤복·정선의 그림이 살아 움직이니 ‘몰입’

훈민정음해례본 전시실에서 발길을 옮기면 정선의 ‘해악전신첩’과 ‘관동명승첩’을 만날 수 있다. 복도를 둘러싼 긴 미디어월에서 조선 후기 관동지방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녹음이 지고, 가을이면 나뭇잎이 흩날리고, 겨울이면 소복소복 눈이 나뭇가지마다 쌓인다.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장면마다 ‘한 폭의 그림’이 영상으로 나타난다. 관람객은 풍속화 한가운데 서서 시간의 흐름을 느껴볼 수 있다.

신윤복의 ‘미인도’ 전시실이 다채로운 빛과 색의 아름다움을 영상화했다면 ‘혜원전신첩’을 주제로 한 전시실에선 당대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른 폭의 그림, 그 그림들에 등장하는 165명의 다양한 사람이 ‘도원’이라는 가상의 마을에서 살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기생 춘홍과 서생 이난, 애틋한 두 사람과 춘홍에 반한 이 마을의 권력자 최대감이 나온다. 사극 드라마 한 편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주인공의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달이 기운 밤, 담벼락에 기댄 남녀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초롱에 의지해 야행에 나선 남녀는 어디로 가는 길이며, 봇짐을 머리에 인 여성과 그네를 탄 여성은 어떤 인사를 나누었을까. 장면마다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관람객의 몫이다. 그림 속에 살아 움직이는 반딧불이는 호젓함을, 먹구름에 천둥소리는 스산함을, 잔 나뭇가지 타는 듯한 빗소리는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최은지 간송미술관 학예사는 “‘혜원전신첩’ 30점의 그림이 온전히 한 번에 공개되는 일은 없었는데 이 전시 영상에는 30점의 등장인물, 배경이 고루 등장한다”며 “실물로 보기 어려운 작품을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또 “일반 전시가 실물 작품의 보존을 위해 전시 기간이 길지 않은 반면에 이 작품들은 긴 시간 볼 수 있고, 각 작가·감독들이 재해석한 작품을 새로운 눈으로 감상할 기회를 준다”고 했다.

정선의 ‘금강내산’과 탄은 이정의 ‘삼청첩’을 영상화한 작품은 상영시간이 각 7분 35초, 7분 37초로 꽤 길지만 관람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금강내산’은 30대와 70대 정선의 시선이 교차하며 사계절의 변화를 보여준다. 자개로 수를 놓은 듯 반짝이는 금강산의 절경에 압도될 만큼 강렬한 시각적 자극을 준다. 실제 금강산을 찍은 듯한 영상은 금강산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 산세를 내려다보는 느낌을 준다. 최은지 학예사는 “금강산을 둘러보는 영상의 스토리와 크기가 확실히 압도적이고 마치 영화를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며 “함께 상영되는 ‘삼청첩’과 비교하면서 보면 두 작품의 느낌이 너무 달라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청첩’은 매화, 난초, 대나무를 빛의 입자로 표현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빛과 소리, 향기까지···‘오감’ 체험형 전시

‘구·달·바·별’ 전시는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기 위해 빛과 소리뿐만 아니라 오감을 활용해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키네틱아트(작품이 움직이거나 움직이는 부분을 넣은 예술 작품), 모션그래픽, 라이다센서(물체 감지 센서) 등의 기술을 적용해 작품과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했다. 관람객의 걸음에 따라 공간의 밝기가 바뀌거나 작품이 다른 모양으로 바뀌는 식이다.

또 전시실마다 전문 조향사들이 참여해 원작 작품과 영상 연출 콘셉트에 맞는 향기를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8번째 전시실인 김정희의 서화 전시실로 가는 길에는 그가 사랑한 수선화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암막을 걷고 추사의 방에 들어서면 움직이는 서체들이 눈길을 끄는 동시에 강렬한 묵향이 코끝을 스친다. 전시실 외 인터미션 공간에도 짚을 엮어 깔아뒀다. 관람객들이 짚 향을 맡으며 짚풀의 질감을 느껴볼 수 있도록 했다.

눈과 귀를 사로잡는 작품들 사이에서, 잠시 한곳을 가만히 응시하며 고요한 시간을 보낼 전시실도 있다.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 전시실이다. 국보인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은 17.5㎝의 작은 불상이다. 563년 보화라는 이가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전시실에선 “정안수와 같은 물속에 고요히 잠긴 투명한 불상의 모습을 관조하며 명상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안내한다.

전시 제목인 ‘구름이 걷히니 달이 비치고 바람 부니 별이 빛난다’는 간송미술관의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이 광복 후 남긴 예서대련에서 따왔다. 일제강점기, 어둠의 시대를 지나 광복의 새 시대를 맞이하는 기쁨을 표현한 문장이다. 간송미술관은 “어둠 속에서 새로운 빛으로 그려낸 우리 문화유산들, 그 상상력을 통해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는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글”이라고 설명했다.

간송미술관은 소장 작품을 디지털 작품으로 재해석한 전시를 이전에도 하긴 했으나 ‘몰입형 미디어아트’는 이번이 처음이다. 간송미술관은 문화유산의 해외 확산을 위해 디지털 전시 ‘이머시브 K(IMMERSIVE K) 시리즈’를 준비해왔는데 이번 전시가 첫 행사다. 간송미술관은 해외 전시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달·바·별’ 전시는 내년 4월 30일까지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진행된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오후 8시, 입장은 오후 7시에 마감된다.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관람 예약은 인터파크티켓에서 할 수 있다. 관람비는 성인 2만원, 청소년 1만5000원, 아동 1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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