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 거제의 한 조선소. 한 때 숙련 용접공들이 수작업으로 조립하던 대형 곡면 블록 위를 이제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누빈다. 로봇은 스스로 도면을 분석하고, 구조물의 형상을 인식해 최적의 용접 경로를 계산한다. 양팔에 달린 토치는 정밀하게 용접선을 따라 움직이고, 열센서와 비전카메라는 실시간으로 품질을 점검한다. 사람은 모니터 앞에서 로봇을 감독하고 작업 결과를 확인한다. 현장의 기술 책임자는 더 이상 단순 작업자가 아니라, 공정을 총괄하는 '현장 지휘자'에 가깝다.”
이 장면은 공상과학이 아니다. K조선의 미래이자 대한민국 소버린 AI 전략의 지향점이다. 실제로 AI는 조선소 용접 불량률을 60% 이상 낮췄고, 반도체 공정의 수율을 8% 이상 높였다. 자동차 조립라인의 가동률을 30% 이상 올렸고, 바이오 분야에서는 신약개발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AI는 산업현장의 생산성을 높이고, 품질을 개선하며, 혁신을 가속화하는 실전의 무기가 되고 있다.
지금 세계는 냉전시대 군비경쟁에 비견되는 범용인공지능(AGI) 패권 경쟁에 돌입했다. 미국은 챗GPT, 제미나이 같은 빅테크의 초일류 언어모델을 앞세워 글로벌 플랫폼을 선점했다. 중국은 ERNIE, DeepSeek-V 등 선진기술력을 뽐내며 자국 중심의 생태계를 완성했다. 유럽은 독자 기술과 거너번스를 기반으로 AI 윤리를 강조하며 차별화 전략을 편다. 그러나 총성 없는 AI 전쟁에서 대한민국의 성공 전략은 현장의 기술경쟁력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 '산업 중심의 소버린 AI' 개발전략이 답이다.
우리는 조선, 반도체, 자동차, 바이오, 에너지 등 산업 기반이 탁월하다. 복잡한 생산 공정에서 쌓인 현장 데이터, 공정 조건, 불량 이력, 전문가의 도메인 지식까지 고스란히 품고 있다. 산업현장은 방대한 양과 높은 질의 데이터, 수십년의 숙련 노하우가 집적돼 AI 성장을 위한 비옥한 토양으로 작용한다. 이처럼 우리 산업은 AI를 단순 자동화 수단을 넘어, 생산성 혁신과 진짜 성장의 '필살기'로 활용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산업 중심 AI를 구현하려면 먼저 산업별 특성에 맞춘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이 급선무다. 시계열 센서 데이터, 불량 이력, 공정 조건 등 산업 고유의 데이터를 도메인 지식과 결합해 고밀도·고신뢰의 제조공정 추론이 가능해야 한다. 둘째, 작업자가 직관적으로 AI를 활용할 수 있는 AI 에이전트 기반의 유연한 플랫폼 개발이 중요하다. 소프트웨어정의제조(SDM) 기술과 제조특화 AI 에이전트를 결합해 민첩하고 지능적인 생산 환경을 구현해야 한다. 셋째, AI를 내장한 지능형 로봇·장비 개발이 시급하다. 이를 통해 복잡하고 돌발상황이 많은 현장에서 유연하고 자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스마트 제조 인프라가 완성된다.
산업별로 보면, 조선산업은 선체 도면, 3차원 스캔 데이터, 과거 용접 이력, 열센서 피드백 등 수천만건의 데이터를 학습해, 비정형 곡면 구조에서도 용접 경로를 생성할 수 있는 AI 모델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3D 비전 분석, 경로계획, 로봇 제어 및 영상 인식에 특화된 AI 프레임워크와 국내 로봇 연구자들이 개발한 비정형 구조 대응 알고리즘이 통합돼야 한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시계열 공정 데이터와 결함 이미지, 수율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공정 이상을 조기에 감지하고 설계 최적화를 지원해야 한다. DeepAR 등 확률적 시계열 예측모델과 AI 설계자동화(EDA)가 필수다. 수요 기업은 공정 데이터를 클라우드 형태로 제공하고, 연구기관은 비식별 학습 모델을 개발해 협력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혼류생산 체계 속에서 AI가 생산 계획을 수립하고 품질을 예측하며 자율물류 로봇을 제어해야 한다. 강화학습 알고리즘 라이브러리, 영상 분석용 딥러닝 모델, 시뮬레이션 최적화 도구가 활용될 수 있다. 국내 기업은 공정 데이터를 제공하고, 공공부문에서 지능형 제조실행시스템(AI MES)과 경량 대규모언어모델(sLLM)을 공동 개발할 수 있다.
바이오 산업은 단백질 구조 예측 모델, 약물 반응 예측 모델 및 약물 구조 생성모델에 국내 실험데이터를 학습한 통합 AI 파운데이션 모델이 필요하다. 이는 신약개발 기간과 임상 성공률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것이다.
에너지 산업에서는 날씨와 수요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전력 수요를 정확히 예측하고, 그래프 신경망(GNN)을 활용해 전력 계통의 전압 흐름과 고장 리스크를 실시간으로 분석해야 한다. 한국형 전력망 구조에 특화된 독자 그리드 모델 개발도 병행돼야 한다.
이처럼 산업별 AI 모델 개발은 기술 주권의 핵심이자,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는 국가 발전전략이다. 정부의 전략과 기업의 혁신이 맞물려 상승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산업 주무부처를 중심으로 하는 통합 거버넌스를 정립해야 한다. 민간 기업,연구소 및 공공기관의 데이터를 연결하고, 산업별 특화 연구개발(R&D)와 AI 인프라를 구축하며, 규제 샌드박스 도입 등 정책 도구를 통합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연구자는 기술개발부터 실증, 사업화까지 책임지고, 기업은 축적된 현장 데이터를 제공하며, 정부는 인프라와 제도적 지원을 맡는 국가 산업 AI 컨소시엄을 구축해야 한다.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산업의 미래 설계도이며 한국경제의 전략 자산이다. 우리는 더 이상 글로벌 플랫폼 기업의 놀이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산업현장을 기반으로 AI 경쟁의 게임체인저가 되어야 한다. 총성 없는 AI 전쟁의 승부처는 바로 산업현장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장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전윤종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KEIT) 원장 art@keit.re.kr
〈필자〉 정책·경제·통상 분야에 능통한 관료 출신 기관장이다. 군산제일고, 서울대 경제학과, 영국 리즈대 경영대학을 졸업했다. 행정고시 36회에 합격해 1993년 상공자원부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지식경제부 투자유치과장, 산업통상자원부 정책기획관·통상협력국장·통상교섭실장 등을 거쳤다. 주유럽연합(EU)·벨기에 대사관 상무관, KOTRA 교역지원센터장, KAIST 과학기술정책센터 연구교수 등 다양한 이력을 쌓았다. 2022년 9월 R&D 전문기관 KEIT 원장으로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