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황 옆 이 남자…16년의 실패 후 얻게 된 깨달음[정혜진의 라스트 컴퍼니]

2025-04-13

“1990년대 후반에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을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엔지니어로 일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십수 년간 3~4개 게임을 말아먹었죠. 대부분 MMORPG였는데 공교롭게도 크래프톤 연합에 합류했습니다. 크래프톤에 들어와 처음 출시한 게임도 실패했죠. 그게 데빌리언 해외 서비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펍지(PUBG)라는 스토리가 탄생합니다. 생각해보면 20년간 엔지니어부터 시작해서 게임 제작을 해온 사람이 크래프톤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2020년 3월 김창한 펍지 CEO를 크래프톤의 새로운 수장으로 선임하면서 진행한 KLT(KRAFTON Live Talk)에서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이 한 말이다. 말미에 장 의장은 이 같이 덧붙였다. “배틀그라운드 성공 이후에 해당 게임 IP를 활용한 게임 제작이나 다른 게임 제작에 관여하고 있고 한국에서 글로벌 서비스를 이 정도로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 중요한 선임 이유였습니다.”

장 의장이 예고했듯이 배틀그라운드를 위시한 크래프톤의 글로벌 시장에서의 존재감은 수년이 지나 입증되고 있다. 지난 10일(현지 시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의 엔비디아 본사를 방문해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게임 특화 인공지능(AI) 분야의 협력을 논의하고 지난 2월에는 샘 올트먼 오픈AI CEO의 방한 당시 협력 방안을 나누는 등 국제 무대에서 러브콜을 받는 존재가 됐다.

게임과 반도체의 공통점…실패의 리스크

젠슨 황과 김창한 CEO가 함께 서 있는 사진에서 문득 겹쳐지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실패에 대한 자세’였다. 게임과 반도체 칩은 그 분야가 굉장히 먼 듯하지만 뛰어드는 입장에서 짊어져야 하는 리스크의 속성은 비슷하다. 일단 개발에 드는 시간과 자본의 투입이 상당하다. 적게는 수십억원부터 많게는 수백억원의 자금이 투입되고 몇 년 간 개발을 하고 나면 이를 중간에 포기하기도 쉽지 않다. 개발 시작 단계부터 제품이나 서비스를 내놓는 시점까지의 기간이 적게는 1년, 길게는 3~4년에 달하다 보면 그 사이 시장과 기술,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급변하기 일쑤다. 필연적으로 ‘실패’를 가정해야 하는 분야에 도전할 때 중요한 부분은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털어내 다음 도전을 도모할 것인가이다.

김창한 CEO의 시작 역시 16년에 걸친 실패였다. 이번 회에서는 10년 간 크래프톤의 내부 소통 자료를 모두 남김 없이 공개한 내역을 바탕으로 지난 달 세상에 나온 크래프톤 회고록 ‘배틀그라운드, 새로운 전장으로(이기문 지음, 김영사 펴냄)’을 바탕으로 김창한 CEO의 실패 리더십이 크래프톤의 DNA에 미친 영향을 따라가 봤다.

2016년 배틀그라운드 개발에 도전하기 직전 김 CEO는 지난 실패를 ‘복기’하면서 과거 프로젝트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따져봤다.

‘로망의 실현’

‘도전과 혁신’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도전과 실패’

특히 5년 간 200억원의 투자금을 투입해 개발한 MMORPG 대작 ‘데빌리언’의 서비스 종료는 큰 타격을 남겼다. 우리나라와 태국에서 출시됐고 초반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결국 실패했고 출시 1년 만에 서비스를 접어야 했다. 당시 지노게임즈에서 프로듀서로서 데빌리온의 개발과 운영을 맡았던 그는 90명의 직원 중 3분의 1을 어쩔 수 없이 내보내는 아픔도 겪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단 한 번, 일년 만’이라는 절박함으로 구성원들을 설득해 시작한 것이 배틀로얄 서바이벌 게임 배틀그라운드였다. 철저히 준비했다. 데빌리언 때와는 달리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고자 했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고객의 반응을 빠르게 살피기 위해 베타 버전을 내놨고 당시 기세 있게 상승 중이던 게임 플랫폼 ‘스팀’을 주 채널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달리한 게 있었다.

‘글로벌 게임을 만들기 위해선 세계적인 인재들과 일해야 하지 않을까’

당시 40억원의 투자금으로 그는 나라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제작자를 찾아나섰다. 국내 개발자들이 납기일을 잘 맞추는 생산에 강하다면 해외 개발자들은 사실적인 총기 모양과 움직임, 음향 효과, 플레이 방식을 비롯해 맵을 통해 경험하는 지형과 건물의 느낌도 다르게 창조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한 배틀로열 장르의 아버지로 꼽히는 브렌던 그린을 비롯해 폴란드 출신 개발자 파벨 스몰레브스키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가 이끄는 ‘액션·건플레이팀’은 단합 대회를 사격장에서 진행하며 40여 종의 총기를 쏴보고 최대한 사실적인 건플레이의 결과물을 내놨다.

한국의 개발자들과 해외의 개발자들이 소통하거나 일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고 이는 종종 잡음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개발 과정의 ‘다양성’이 게임에 그대로 녹아들어 전 세계 이용자들에게 소구할 수 있게 됐다.

배틀그라운드는 일 년 만에 세상에 나왔고 2017년 3월 게임 출시 직전에 팀원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결과는 알 수 없습니다. 출시 한 달 뒤에 우리 팀을 유지할 수 없는 매출이 나오면 팀은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는 놀랍게도 ‘돌풍’이었다. 2017년 3월 얼리 액세스를 시작한 후 그해 말까지 전세계에서 24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처음에 김 CEO가 50만장의 판매고를 목표로 잡았을 때도 이를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적 같은 성공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해 블루홀의 매출은 6665억원을 기록했다. 대부분 배틀그라운드가 견인한 매출이었다.

다시 본질로… 네 가지 질문

일년 뒤인 2018년 말 배틀그라운드는 화려한 비상을 뒤로 하고 모든 지표가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펍지의 2018년 매출이 처음으로 1조원을 돌파했지만 2분기 순이익은 1분기의 절반 수준에 그쳤고 PC방 점유율 또한 3월에 정점을 찍고 하반기에는 리그 오브 레전드(LOL)에 1위 자리를 내줬다. 중국 시장에서도 점유율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김 CEO로서는 가장 불안했던 시기였다. 재정립이 필요한 시기에 김 CEO는 펍지 구성원과의 올핸즈 미팅에서 “스스로도 본질을 잃고 있었다”며 네 가지 질문을 던졌다.

우리의 본질적 가치에 스스로 집중했는가

그 본질적 가치를 키웠는가

이를 통해 우리가 만족했는가

우리의 팬이 만족했는가

특정한 숫자로 나타나는 결과가 목표가 아니라 처음 시작한 배틀로열 게임 장르의 충성스러운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면 숫자로 나타나는 결과는 떨어졌더라도 최소한 해낸 일에 자부심을 가질 수는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다시 점검해 보니 블루홀 시절부터 가동된 37개의 제작 프로젝트 가운데 출시 후 1년 이내에 손익분기점(BEP)를 달성한 게임은 배틀그라운드를 포함해 단 네 개에 불과했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했다.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성공’ 대신에 ‘실패’라는 단어를 갈아끼워넣었다.

어떻게 실패할 것인가

2019년 11월. 펍지 사옥 6층 회의실에서는 특별한 면담이 열렸다. ‘프로젝트 팔라우’라는 이름의 경영 평가 TF가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펍지 대표인 김창한도 면담에 임했다. 그는 자신의 3년 간의 임기에서 잘한 일로 는 빠른 결정과 PD 역할을 내려놓고 거시적인 경영 전반을 보기 시작한 것을 꼽았지만 두 가지 아쉬움도 내비쳤다. 사람을 조금 더 천천히 뽑을 것. 서비스 지역 확장을 줄이고 게임에 더 집중할 것. 당시 배틀그라운드는 성장세를 잃고 지표가 정점에서 내려오던 시기였다.

이때 TF에서 질문을 던졌다. “교훈 같은 게 있나요? 돌아가서 다르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배운 것 중에 하나는 빠르게 해외 지사장을 뽑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위급 인재 여러 명을 뽑아봤는데 내보낸 사람만 3명입니다.” 이유는 잠깐 면접만 보고 그 사람이 잘할 지 판단하는 것 자체가 맞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를 통해 얻은 교훈은 ‘콘텐츠가 왕이다’ 즉, 크리에이티브에 해당하는 제작 능력을 강화하는 것만이 왕도라는 점이었다. 그는 덧붙였다. “무슨 포지션이든 안 뽑아서 회사가 망하는 그런 자리는 없다는 게 결론입니다.”

실패를 숙명으로 하는 게임 업계에서 실패에 대한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것이 김 CEO에게는 중요한 과제가 됐다. 201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최대 게임 컨퍼런스인 GDC에서 그가 픽사에서 오랜 기간 일한 아트 디렉터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큰 영감이 됐다.

“어떻게 픽사는 연속해서 새로운 IP를 창조할 수 있나요?”

그의 대답은 ‘프로젝트 중단(Drop)’이었다. 팀원들이 3~6개월 간 온 힘을 다해 일해도 평균적으로 10개 중 4개의 프로젝트만 살아남는다는 것. 시도를 하되 빠르게 실패하고 이를 통해 효율적이고 의미있는 도전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가 내린 의미 있는 도전이라는 것은 한계를 극복해 게이머의 로망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디자인, 기술, 아트의 한계를 뛰어넘는 목표를 설정하고 남들이 못 하거나 안 하는 것에 도전해 게이머들의 로망을 어느 한 부분이라도 실현해줄 수 있다면, 열성팬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김 CEO가 도달한 결론은 성공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게임, 스스로가 즐길 수 있는 재밌는 게임, 그 재미를 즐길 수 있는 열성팬이 있는 게임, 새롭고 혁신적인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크래프톤의 3.0의 방향이 마련됐다.

다음 회에 이어서 크래프톤이 정반합의 연합이 가능했던 이유를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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