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님, ‘스토킹 살인’도 재난입니다

2025-08-11

한국은 안전한 나라인가? 2024년 통계청 사회조사를 보면, 우리 사회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시민은 28.9%에 그친다. 밤에 혼자 걸을 때 불안하다는 비율은 30.5%인데, 여성(44.9%)의 불안감이 남성(15.8%)보다 3배쯤 크다. 국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감각’의 결핍 탓일 터다.

최근의 스토킹 살인 등을 보라. 문자 그대로 ‘하루가 멀다 하고’ 여성이 목숨을 잃고 있다. 경기 의정부(7월26일), 울산(7월28일), 대전(7월29일), 서울(7월31일), 경남 김해·창원(8월4일)에서 여성 5명이 숨지고 1명이 중태에 빠졌다. 가해자는 모두 전 연인·동료·지인 등 ‘아는 남성’이다. 이들 사건 중 일부는 사전에 스토킹 피해를 신고한 경우였다. 국가는 여성 시민을 구하지 못했다.

대형 화재가 발생하면 스프링클러 가동 여부를 따지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노후 건물 밀집지역인지, 필로티 구조인지, 소방검사는 제대로 받았는지 등 구조적 취약성도 살펴야 한다. 열흘 사이 무고한 여성 시민 6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 정도면 사회적 재난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검·경의 소극적 대응에 책임을 묻고, 사전 분리조치를 강화하는 등의 조치는 당연하다. 그러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면에 가려진 구조적 원인을 봐야 한다. 사실 가려진 것도 없다. 이미 드러나 있다. 피해자는 여성, 가해자는 친밀한 관계의 남성. 스토킹 살인·교제 폭력·관계성 범죄 같은 모호한 정의 말고 ‘젠더 기반 폭력’ ‘여성 대상 폭력’ 등으로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김대중·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는 당이다. 김 전 대통령은 여성부를 신설하고 비례대표 여성 할당제를 법제화했다. 노 전 대통령은 여성부를 여성가족부로 확대 개편하고, 호주제 폐지와 성인지(性認知)예·결산제도 도입을 이끌었다. 2000년대 중반 민주당 취재를 담당했던 나는 성평등과 여성 인권에 진심이던 민주당을 기억한다.

민주당이 경로를 이탈하기 시작한 건 안희정·박원순·오거돈 등 당 소속 광역단체장들의 성폭력·성희롱 사건 때부터다. ‘안티 페미니스트’ 이준석이 국민의힘 대표가 되자 민주당의 ‘변침’은 더 심해졌다. 이준석의 성별 갈라치기에 단호히 대응하는 대신 외면하거나 모호한 입장으로 일관했다.

2030 여성들은 12·3 내란 이후 색색가지 응원봉을 들고 광장에 나왔다. ‘빛의 혁명’을 견인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모진 추위를 서로의 온기로 이겨낸 키세스 시위대” “오색 빛 K-민주주의”(7월13일 세계정치학회 서울총회 개막연설) 등으로 상찬했다.

‘여성’은 그럼에도 호명되지 않는다. 대통령실 홈페이지에는 ‘대통령의 말과 글’이란 항목이 있다. 주제어를 넣어 검색이 가능한데 ‘여성’을 검색하면 “등록된 게시물이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뜬다(8월11일 오후 6시 현재).

이 대통령은 의정부 스토킹 살인 사건을 두고 말했다. “범죄가 충분히 예상되는데도 ‘피해자’의 절박한 호소를 외면하는 무능하고 안이한 대처가 끔찍한 비극을 반복 초래했다. 관계 당국이 뼈아프게 받아들이고 자성할 뿐 아니라,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바란다. 탁상공론으로 ‘국민’의 일상을 제대로 지키기 어렵다. 피해자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제도 보완에 속히 나서달라”(7월31일 수석·보좌관회의).

이 대통령의 질타는 의미있다. 통렬하다. 그러나 ‘피해자’ ‘국민’이 여성이라는 구조적 맥락은 빠져있다.

“예상할 수 있는 일들을 방어하지 않고 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거죠.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아닙니까.” 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산업재해 발생 기업을 질타하며 한 말이다. ‘소년공’ 출신 대통령은 산재에 대한 국가적 인식과 대응에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그래서 이런 말도 듣고 싶다. “국민의 절반인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목숨을 잃는 비극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예상할 수 있는 일들을 방어하지 않고 사건이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거죠. 검찰·경찰과 관련 부처에 당부합니다. 여성이 폭력에 시달리다 죽음을 당하는 일이 다시 있어선 안 됩니다. 국회에도 정중히 요청합니다. 여성폭력 관련 법안들의 심의를 서둘러주시기 바랍니다.”

노동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대통령의 ‘마음’이 또 다른 약자이자 소수자인 여성들의 고통에도 가닿았으면 한다.

운전하다 길을 잘못 들면 내비게이션 메시지가 나온다. “경로를 벗어났습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이제, 경로에서 이탈했던 성평등 정책을 제자리로 되돌려놓을 때다. 최우선 과제는 1년6개월째 공석인 여성가족부 장관에 적임자를 임명하는 일이다. 여가부 장관 인사는 여성 시민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이 대통령은 여성·젠더 정책에 대한 신념과 전문성, 추진력과 리더십을 갖춘 후보자를 조속히 지명하기 바란다. ‘실천가 이재명’이 한국 성평등 정책의 새로운 내비게이션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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