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일지] 영화 <반구대 사피엔스>, 다큐멘터리 <반구대별곡> “⑳ 메아 꿀빠”

2024-10-12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다큐멘터리건 극영화건 이야기 재료를 위한 취재는 필수다. 수박 겉핥기 취재를 하면 구성안이든 시나리오든 딱 그만큼만 나온다. 단수 또는 극소수의 자료를 참고하면 역시 딱 그만큼 나온다. 너무 많은 취재란 있을 수 없다. 취재량은 많을수록 좋은 결과물을 담보한다. 이때 구성하는 과정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면 산만해진다. 논문 예비 심사 때 심사위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은 참고문헌을 너무 많이 봤다는 것이었다. 적당히 보라고 했다. 고백하건대 내가 정리를 못해냈을 뿐, 너무 많은 자료조사가 문제 될 이유는 절대 있을 수 없다. 단어 하나도 신중해야 하는 논문은 물론 스토리텔링에는 방대한 자료와 취재가 지문이든 대사든 단 한 줄로 압축될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한마디, 그 한 줄을 위해 취재와 자료조사에는 한계가 없다.

그런데 취재와 자료조사가 한 사람이나 한 가지 주장에만 국한하면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다. 양으로 승부를 보는 게 아닌 이상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지게 된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위험하다. 하나는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글을 쓴다는 자의 티끌 같은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게 있어서 나름대로 변주하게 되는데, 한정된 자원 안에서 빈약하거나 게으른 창작의 결과가 대체로 터무니없다. ‘코끼리’라고 귓속말을 시작했는데 열 명쯤 거치면 ‘개구리’라고 변질되는 것과 똑같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짓이다. 다른 하나는 창작자로서 악질적인 경우인데, 쓰레기 같은 결과물을 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냐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자를 비난하는 것이다. 자기변명을 하는 이런 자들은 다행히도 저 깊은 속에서 부끄러워하는 자아가 숨어 있다. 그렇게 믿는다. 안 그렇다면 창작이라는 고통에 대하여 너무 모욕적이지 않은가.

아무리 성실하게 자료를 많이 수집했다 하더라도 이를 정리할 시간이 없다면 이 또한 문제다. 내가 논문 심사에서 지적받았듯 산만해서 요지를 알아채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 된다. 그래서 콩 농사도 어렵고 팥 농사도 어렵고, 창작은 더 어렵다.

교차검증은 꼭 필요하다

기획 수업이나 시나리오 및 구성 수업 때마다 관습적으로 학생들에게 했던 말이 있다. 과학은 99퍼센트를 밝혀내도 마지막 1퍼센트까지 검증해야 하지만 영화는 1퍼센트, 아니, 더 희박한 가능성이 있더라도 있을 법하다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사실은 과학계의 이와 관련한 기준을 모른다. 스토리텔링의 소재나 주제와 비교하려고 갖다 붙인 것이다).

낯선 플롯을 구성할 땐 물론이고 모든 이야기는 도입부에서 관객을 준비시켜야 한다. 난 이것을 ‘게임 설명서’라고 비유하는데, 등장인물이라거나, 소재나 주제라거나, 구성 방식이라거나, 장르라거나 등등을 미리 제시해야 한다. 예고편이나 기사 등의 홍보·광고를 통해 알게 됐더라도 상영이 시작되면 이 과정은 필수 통과의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20, 김용훈)과 같이 주연배우인 전도연 씨가 상영 40퍼센트쯤 지났을 때 화면에 갑작스레 등장하는 건 A급 배우를 쓴 영화의 기고만장한 변주다. 그만큼 자신 있으니 그렇게 문법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기괴한 사랑 이야기든, 정신줄 놓게 만드는 판타지 영화든, 치 떨리는 범죄영화든 게임 설명서에 따라 100분 동안 관객이 연출을 따라갈 수 있다. 이게 없는 콘텐츠는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콘텐츠에 예외가 없다. 없다면 그건 쓰레기다. 완성된 게임 설명서를 위해 자료조사나 취재 과정에서 교차검증은 필수다. 극영화에서는 구성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고, 다큐멘터리에서는 연출자가 추구하는 ‘진실’에 신뢰를 준다.

반구대 우물 안 개구리, 바로 나

반구대에 오르내린 지 만으로 4년이 넘었고 햇수로는 5년째다 보니 반구대의 사람들과 사건들은 어지간히 안다고 자부해왔다. 종종 내가 반구대 주민이라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고, 심지어 반구대로 이사 갈 생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올해 초까지는 최소 10년을 목표로 취재만 해오다가 지원사업으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작업하면서 작은 매듭을 하나씩 지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몹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좁고 깊은 취재를 올해는 넓고 얇게 진행하기로 했다. 원래는 갈등에 좀 더 집중하고 그 갈등의 고리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데 방점을 찍었었는데 좋은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됐다.

최근 2주간 매일 반구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났고 크고 작은 풍경들을 더 많이 촬영했다. 폭넓게 사람을 만나고 벌어지는 일들을 양적으로 늘려서 확보한다는 게,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되려 더 가까이 더 깊게 들여다보게 됐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간의 방대한 자료조사량과 취재량은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바닥만 더 깊이 파나가는 형국이었고, 확보한 내용은 내 발품에서 얻어내 내가 판단한 내용이 아니라 편향된 내용을 수용한 것이었다. 그 좁은 안에서도 나름대로 극단에 놓인 상황들의 교차검증과 판단에 따라 걸러내고 분류하긴 했지만, 어찌 보면 내가 가진 정보는 괴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의 진실들을 취합해 연출자로서의 진실을 찾아내는 일이 더 복잡하고 어렵게 됐다. 다만, 처음엔 한숨 쉬게 만든 이 계기가 전체적으로 전환의 계기가 됐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허겁지겁 뛰어가던 중에 호흡을 고르며 정속 주행하는 안정감이 든달까. 수박 겉핥기나마 전체를 다 담아내진 못해도 많이 다루려 했는데 아무래도 이번엔 일부분만 보여줄 수밖에 없을 거 같다. 조급증을 누그러뜨리고 전체의 한 부분을 제대로 다루는 게 맞을 것 같다.

되게는 못 해줘도 안 되게는 어렵지 않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지만, 다른 사람이 평생 시행착오를 거쳐 이룩한 것을 어떤 대가도 지급하지 않고 달콤한 과실만 쏙 훔쳐낸다거나,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그 사람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상도(商道)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다. 밀어낼 뿐만 아니라 아예 일어날 수도 없게 콱콱 밟는 인간들도 있어서 치가 떨리게 하는 일이 참으로 많다. <서울의 봄>(2023, 김성수)에서 속도감지기를 빼앗기는 개발자의 억울함과 분노에 공감했듯, 정말이지 빌어 처먹을 못된 짓들이다.

취재하다 보면 사람과 사람 간의 갈등 구조가 잘 보인다. 흥미로운 사실은(너무도 당연하지만) 교훈적인 전래동화처럼 일관성 있는 캐릭터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내밀한 이야기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누구도 자신이 하는 말을 오롯이 들어주는 일이 없어서 키노 아이(Kino Eye, Kino Glass, 영화의 눈, 카메라의 눈)를 대할 땐 자기만의 시간이 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이런저런 속말을 내뱉게 되는 법이다. 그런 경우 만족스러워하기도 하지만 후회할 때도 많다. 답답한 게 풀린 듯하면서도 치부가 드러난 것 같음이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종종 카메라를 활용하거나 이용하는 자들도 있다. 기록의 힘을 아는 자들이다.

정보란 권력이기도 하지만 자멸의 수단이기도 하다. 공자 말씀에 많이 아는 자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말이 있듯, 주진우 기자가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의 핵에 다가갈수록 사라지는 기자들이 많았다고 말했듯, 정보는 활용 가치가 높으면서도 위험도가 무척 높다. 그럼에도 정보는 그 무게의 중함이나 경함과 무관하게 대체로 권력으로 활용되는 때가 많다.

최근 스태프들과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있었다. 외면상으로는 별문제가 없어 보이거나 드러났다고 해도 잘 봉합된 것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들이 있다. 극영화 <(가제)반구대 사피엔스> 중간보고에서 심사위원들이 말했다. “모두 차치하고, 감독인 당신이 선택했고, 감독 당신이 판단했으므로 결국 모든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중간보고가 진행되는 내내 당신들이 감히 어떤 전문성으로 날 평가하는가, 하고 화가 치밀어올랐다가 이 한 문장에 기를 꺾었다.

참 많이 당했다. 훔침을 당했고, 떠밀려 짓밟힘을 당했고, 가시범위 밖에서 안 되게 하는 힘에도 당했다. 참 많이도 당했다. 그래서 난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왔다. 정의로운 척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스태프들과의 갈등에서 문득 이들의 노고를 훔칠 수 있고, 이들의 내적 외적 갈등을 알고 있으며, 이들을 되게 하게도 안 되게 하게도 할 수 있는 권력이 나에게 있음을 깨달으면서 흠칫 놀랐다. 천박한 년, 자신에게 욕했다.

일이 잘되면 ‘우리’ 덕분이고, 잘 안되면 그건 ‘내’ 탓이다. 이 신조만은 지키자. 그 끝에 작품의 완성이 있을 것이다.

이민정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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