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망원시장에서 생전 처음 보는 것을 봤다.
이게 붙어 있던 곳은 된장과 고추장을 파는 집이다. 빵집에서 빵 나오는 시간을 적어놓은 건 흔히 본다. 정육점에서 소 잡는 요일을 간판에 새겨 놓은 것도 본 적 있다. 하지만 장 담그는 날을 따로 알려주는 건 처음 봤다. 더 신기한 건 그날이 바로 ‘손 없는 날’이라는 거다. 손 없는 날에 이사하는 건 나도 안다. 이때 이사를 하면 가격이 더 비싸다. 그런데 손 없는 날과 고추장의 상관관계는 도통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몇달 전 일이 떠올랐다. 같은 빌라에 사는 아주머니가 김장을 했다며 김치를 주신 적이 있다. “우리 김장하느라 많이 시끄러웠죠, 아휴, 좋은 날 받아서 하느라…” 웃으며 김치를 받으며 속으론 물음표 10개를 띄웠다. 김장하는데 좋은 날을 받았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지? 좋은 날씨에 한다는 건가, 아니면 휴가를 냈다는 건가?
망원시장에서 손 없는 날에 장을 담근다는 걸 보자 갑자기 이해가 됐다. 아주머니가 김장을 한 ‘좋은 날’은 바로 ‘손 없는 날’이었다!
김장은 한두 명이 하는 게 아니니 참여자들의 스케줄을 맞춰야 하고, 옥상에서 하니 비도 오면 안 된다. 스케줄과 날씨를 맞추는 것도 힘든데 거기에 ‘손 없는 날’까지 따져 김장을 했다니 놀라웠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손 있는 날 김장을 한다고 무슨 큰일이 난단 말인가. 끽 해봤자 김치 맛없는 것 말고 닥칠 일이 뭐가 있다고. (물론 김치가 맛없는 것은 심각한 일이 맞긴 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검색해보니 손 없는 날에 장을 담그거나 김장을 하는 건 생각보다 보편적인 문화였다. 여기서 ‘손’이란 귀신이다. 더 전문적으로 들어가 보면 ‘태백살’이라는 인도 밀교 출신 귀신인데(잠깐, 인도 귀신이 왜 한국까지?) 이틀 간격으로 동서남북으로 옮겨 다니며 해코지를 하는 나쁜 놈이다. 이 귀신은 딱히 한 맺힌 개인은 없는지 사람과 김치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액운을 뿌린다.
지금은 이사 정도에나 손 없는 날이 적용되지만 예전엔 전쟁의 출전, 배 타기, 결혼, 장례, 나무 베기, 집수리 같은 온갖 것에 모두 손 없는 날을 따졌다고 한다. 심지어 김장과 음양오행설을 이어붙이는 사람도 있었다. 소금을 물에 타서 사용하기 때문에 물과 조화를 이루는 ‘화(火)’ 기운이 있는 날 김장을 해야 김치가 맛있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은행에서 나눠주는 커다란 달력에는 항상 음력 절기와 ‘손 없는 날’이 표기되어 있었다. 반면 어릴 때 우리 집에 있던 교회 달력에는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표기되어 있다. 두 세계관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 우리는 달력과 세계관을 선택할 수 있다. 심지어 내 마음대로 도시관찰달력 이런 걸 만들어 써도 아무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옛날엔 이런 일이 절대 있을 수 없었다. 달력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라님이고 모두가 하나의 달력과 세계관을 따랐다. 조선시대에는 달력을 만들다 사형당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이렇게 다양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살게 된 것은 100년 정도밖에 안 됐다. 에이미 추아의 책 <정치적 부족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현대에 살지만 뇌는 아직 부족사회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세계관 속에서 내가 속한 부족의 신념에 따라 살아간다. 아랫집과 윗집에 살아도 그와 나의 부족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속한 부족의 눈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80년대에 태어난 여성이자 결혼을 하지 않은 프리랜서 그림 작가’라는 부족이다. 내 사고방식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와 다른 사람들의 세상에 어디까지 접속할 수 있을까? 내가 관찰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결국은 다른 사람의 세상이 궁금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봄날, 나는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의 세상을 잠시 엿보았다.
서울에 있는 모 공원에서 본 일이다. 이 공원은 다른 데와 마찬가지로 낮에 가면 어르신들이 많이 모여 있다. 입구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는 낮술을 즐기는 분들도 많은데 그 열기가 어느 헌팅포차 못지않다. 보통 어르신들은 남녀칠세부동석을 지킨다. 그래서 할아버지들 노는 곳과 할머니들 노는 곳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이 공원은 신기하게도 성별과 상관없이 서로 어울리는 분위기이다. 큰 나무와 작은 관목들 사이엔 박스를 깔고 잠을 청하거나 장기를 두는 무리들도 있다. ‘도박금지’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꽤나 재밌는 일들이 많았을 것 같다.
공원 건너편엔 오래된 주공 아파트 단지가 있다. 그곳 주민들은 지하철에서 내려 집까지 가는 길에 이 공원을 지나가야 한다. 퇴근길엔 사람이 꽤 많은 편이다. 출구 앞에는 호두과자를 파는 사람도 있고 사주풀이 하는 어르신도 있다. 큰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아래엔 박스를 깔고 채소 몇 가지를 파는 할머니들도 있다.
그날은 봄이지만 매우 더웠다. 이 부지에 유일하게 있던 카페에서 좀 쉬어가기로 했다. 전망이 보이는 2층 발코니에 앉아 시원한 스무디를 들이켜려는데, 아래쪽 소나무 숲에 어르신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약간 떨어진 곳에는 채소를 팔고 있는 선캡 쓴 할머니의 뒤통수도 보였다. 시간이 흘러 다섯 시쯤, 해가 낮게 기울자 채소 노점 할머니가 장사를 마쳤다. 그리고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싸리나무 빗자루로 자기가 있던 자리를 슥슥 쓸었다. 노점이 있는 것만 보았지, 철수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바닥에 깔았던 박스는 내일 또 쓰는 건지 버리지 않고 잘 접어 관목 사이에 숨겨두셨다.
이제 퇴근하시는 건가? 이 동네에 사시는 걸까, 아니면 전철을 타고 멀리 가시는 걸까? 궁금했던 찰나 할머니는 가방을 챙기더니 박스를 숨겼던 관목을 스윽 타넘어갔다. 그러고는 뒤에 자리를 깔고 있던 어르신 무리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무리는 늘 있었던 일처럼 할머니를 기쁘게 반겼고, 비닐봉지에 싼 떡을 권했다.
“어-이!” 그때 마침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할아버지 한 분이 멈춰서더니 무리를 향해 손을 흔든다. “이제 끝나셨어?” 묻더니 자전거에서 내려 또 무리에 합류했다!
벚꽃은 마지막 꽃잎을 흩날리고, 틈새로 나무에 점점이 돋아나는 연두색 새싹까지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노점 할머니는 선캡을 벗고 흰머리를 손으로 슥슥 빗어넘겼다. 그리고 몸을 가볍게 흔들며 비처럼 내리는 벚꽃잎을 바라본다. 잘 들리지 않는 대화가 이어진다. 웃음소리도 들리고 가끔 “캬~”하는 감탄의 소리도 들린다. ‘평온한 한때’라는 건 바로 저런 걸 두고 말하는 걸까?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 열차~”
어디서 고운 가락이 들린다. 자세히 보니 채소 노점 할머니가 한 곡조 뽑고 있다. 어깨도 왔다 갔다 박자에 맞춰 흔들린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노래는 조용필의 ‘대전블루스’였다.) 무리는 할머니의 노래를 듣고 있다. 한 명은 손뼉을 치며 흥을 돋운다. 즐겁다. 몰래 지켜보는 나까지도 저절로 웃음이 난다.
그냥 스쳐 갈 때는 몰랐다. 길가에 앉아 채소 몇 가지를 바구니에 담아 놓고 파는 할머니들을 보면 늘 안타까웠다. 저게 장사가 되나? 집에서 쉬시는 게 차라리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다. 너무 고생스러운 삶이라고 건방지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들의 일상에도 지극히 평온하고 즐거운 순간이 있었다. 단지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도시는 넓고 사람은 많다. 매일 밖에 나가 돌아오는 순간까지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을 스쳐 간다. 그 모두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궤적이 있고,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니. 버겁고 또 벅차기도 하다.
관찰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다. 이 지구에 사는 사람의 수만큼, 관찰할 세계는 끝없이 많다. 역시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저서로는 <이다의 자연관찰일기> <내 손으로 치앙마이><걸스토크><내 손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등이 있다. 그림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는 것이 소망이다.